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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팀 알퍼의 한국 일기] 비를 향한 한국인과 영국인의 은밀한 사랑

팀 알퍼 칼럼니스트

입력 2016.10.18 03:12


영국엔 끊임없이 비 오지만 대부분 우산 안 갖고 다녀 "비야 그냥 말리면 되지"
한국인은 비오는 날이면 발라드·부침개 떠올리며 혼자만의 고독 즐기는듯

내 할아버지는 걷기를 무척 좋아하셨다. 내가 걸음마를 시작하자 숲으로 골목길로, 긴 산책길에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우리가 집을 나서기 전 하늘에 잿빛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나는 할아버지에게 물어봤다. "할아버지, 비 오면 어떻게 해요?" 할아버지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럼 빗속을 걸어보자꾸나!"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할아버지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할 것이다. 한국에서 근무 시간 중에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사무실 전체가 술렁인다. "어머, 나 우산이 없는데!"라고 외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어떤 이들은 동료에게 간절히 애원한다. "혹시 남는 우산 있어?" 아니, 이 나라 사람들은 몸이 설탕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거야? 왜 이리 비를 무서워해? 영국에는 정말 여러 종류의 비가 있다. 맑은 날 갑작스럽게 지붕을 뚫을 기세로 쏟아지는 비, 며칠간이고 계속되는 이슬비….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를 즐겨 보는 이라면, 영국 날씨가 어떤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선수들은 대개 빗물 때문에 쩍 들러붙은 유니폼 차림의 물에 빠진 생쥐 몰골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비가 오는데도, 영국인 대부분은 우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에 검은 장우산을 든 '영국 신사'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이미지 속의 모습은 몇십 년 전까지는 사실이었다. 그때 런던에서는 이런 차림의 남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멋진 신사에 대해 한국인이 잘 모르는 게 있다. 영국 신사의 우산이 사실은 액세서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접은 장우산이 정장과 모자에 어울리지만, 펼쳐든 우산은 전체적인 실루엣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영국 신사들은 우산을 펴지 않고 거리를 활보했다.



비가 쏟아질 때 영국 사람들의 대처법은 '그냥 흠뻑 젖는다'이다. 지금 영국 사람들에게 왜 우산을 안 가지고 다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비는 그저 물인데, 젖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냥 말리면 됩니다."

11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만큼 비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그 어디서도 본 적 없었다. 한국인은 우산이 없으면 신문으로 머리라도 가린다. 내게는 어처구니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이다. 신문은 읽기에는 좋지만 방수 기능은 없으니까. 신문이 없으면 손바닥을 펴서 머리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젖지 않게 가린다. 한국인들은 종종 내게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는 산성비가 많이 내리는데 그냥 맞았다가는 대머리가 될지도 몰라." 과연, 그럴까? 나는 한국에 온 이후 비 오는 날 달리기를 자주 하는데 머릿속까지 흠뻑 젖은 적이 셀 수 없지만, 탈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비를 대하는 한국인과 영국인의 태도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르다. 영국을 떠나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나를 포함한 영국 사람들은 절대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벌린다는 것이다. 비에 젖는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결코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영국 국가는 '나는 우산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가 되어 마땅하다. 영국인들은 어떤 스포츠이건 쏟아지는 빗속에서 하는 경기를 좋아한다. 비가 내리면, 영국인들은 공원으로 몰려나가 축구공을 차며 흥분한 오리처럼 진흙탕에서 슬라이딩을 해댄다. 우리는 비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맨유에서 뛴 박지성은 이미 알겠지만, 맨체스터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도시 중 하나다. 그 맨체스터에는 이런 민요가 전해져 내려온다. '비가 오는 날 맨체스터로 나를 데려가 주오/ 앨버트 광장에서 내 발을 씻고 싶소/ 나는 자욱한 안개가 너무나 그립소/ 나는 비가 쏟아질 때만 진정으로 행복을 느낀다오."

박지성, 앨버트광장/맨체스터

한국에서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야구 경기, 야외 콘서트, 간혹 친구와의 약속까지 모든 일정이 취소된다. 그러나 나는 사실 많은 한국인이 비 오는 날 집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긴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살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한국인과 영국인의 비에 대한 집착이 희한하게도 아주 닮았다는 것이다. 영국인은 비에 마초적으로 접근 하는 것을 즐긴다. 물웅덩이에서 첨벙대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비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지를 자랑한다. 반면 한국인은 비 오는 날이면 집에 들어앉아 감성적인 발라드를 틀어놓고 부침개를 떠올리며 멜랑콜리한 혼자만의 고독을 즐긴다. 그러니 비에 대해서만큼은 영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은밀하고도 치열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17/20161017036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