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 산마루교회 담임목사
입력 2019.09.20 03:11
지난여름은 충만하였습니다.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강원도 평창군 산언덕에 공동체를 세운다고 온몸을 바쳤습니다. 산지처럼 되어버린 밭 수천 평을 농지로 만들었습니다. 5만여 평 곳곳의 무너져 내린 물길을 뚫고, 잡초로 뒤덮인 길의 잡초를 거두어내고, 잡목으로 뒤덮인 언덕엔 오솔길을 냈습니다. 물이 고인 곳에 연못을 팠습니다. 도무지 사람 손으로는 할 수 없어 굴착기를 긴급 구입했습니다. 구입할 돈이 없어 소식을 알리니 너무도 많은 고마운 손길들이 당도하여 한 달 만에 5.5t짜리 굴착기를 구입하였습니다. 굴착기를 급히 현장에서 배워 숲속으로 들어가니 그 위용은 무시무시했습니다. 숲과 나무와 꽃들을 묵상하던 나는 순간 파괴자로 둔갑해 있었습니다. 장비를 들이대면 손목 굵기의 나무들은 물론이고 허리만큼 굵은 것들도 순식간에 부서져나가고, 뿌리째 뽑혀 나갔습니다. 마치 내가 살인을 저지르는 듯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그 스트레스가 저녁에 이르러선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실로 장비는 산마저 작아 보이게 했습니다. 인간의 손에 쥐어진 도구가 그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가를 실감했습니다. 그러니 더 큰 장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나, 군대를 거느리거나, 핵폭탄까지 손에 쥔 독재자라면 그 어떤 자만에 빠지게 될까, 두려운 일입니다.
여름은 지나고 가을이 오고 말았습니다. 자립 자활을 목표로 함께 일하기를 모색하던 노숙 생활하던 분들도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모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몸은 허리 다리 손가락 뼈마디 마디마다 고통으로 멈추어 섰습니다. 머리숱은 4분의 1은 빠져 버렸습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뒤처리를 하는데 손가락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아, 내 몸으로 할 일은 이제 마지막까지 왔구나! 이 한 해, 적어도 몸으로 할 일은 끝까지 했구나! 이 일로 부끄러울 일은 없겠다."
고통 중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작은딸이 출산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딸아이 자랄 때에 사랑할 시간 여유조차 없었으니, 이 순간이라도 같이 있어주어야겠다고 아내와 함께 달려갔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아이가 커서 아기를 낳다니! 분만실 밖에서 잠시 기다리니,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간호사가 환한 얼굴로 문을 열면서, 하얀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마주친 손자의 얼굴은 생명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그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는 내 인생의 또 다른 계절을 알리는 메아리였습니다. 내 자식 태어나 처음 대할 때와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무거운 인간적 책무로 서늘해졌습니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여, 저 아이와 일평생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산모는 만삭 때보다 더 환한 미소와 밝은 큰 눈빛으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온 가족은 말없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저 어린
생명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오래오래 살아서 저 아이를 지켜보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일까? 요즘은 '할아버지의 재력'이라고 하는데…. 미안하구나. 이 할아버지는 이미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겠다며 살아왔고, 자녀들에겐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 하며 살아왔으니 어쩌니. 네게 오래오래 길이 되어 줄 할아버지가 되는 수밖엔 없겠구나! 수리야, 사랑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19/20190919033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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