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선임기자
입력 2019.11.07 03:13 | 수정 2019.11.07 06:10
해홍나물·칠면초 등 염생식물… 요즘 갯벌에 자주색 '카펫' 연출
자연이 빚어내는 놀라운 색채… 게 등 다양한 생물 서식지 역할도
비슷비슷해 구별 어렵지만 사랑·관심 가지면 차이 보여
지난 주말 강화 석모도에 들어서자 자주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갯벌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해홍나물·칠면초 등 염생(鹽生)식물이 만들어내는 장관이다. 특히 나무깨 버스정류장 근처 염생식물 군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바다 건너 강화도 산에 있는 단풍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연출했다. 갯벌에서 어떻게 저런 고급스러운 색이 나올 수 있을까 놀랍다.
가을엔 산만 단풍이 드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도 붉게 물든다. 산에 있는 단풍보다 더 진한 자줏빛이다. 가을에 인천국제공항에 가느라 영종도에 들어서면 서해 갯벌이 자주색으로 물든 것을 볼 수 있다. 염분이 있어도 살 수 있는 해홍나물 등 염생식물들이 무리를 이룬 모습이다. 석모도·영종도만 아니라 서·남해안 갯벌에서는 염생식물로 뒤덮인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시흥·고창·신안·순천 등과 같이 갯벌 생태 공원을 조성해 데크를 따라가며 염생식물을 관찰할 수 있게 해놓은 곳도 많다.
이 염생식물 무리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권지예의 단편 '꽃게 무덤'으로, 2005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의 표제작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자살하려는 여인을 우연히 구하고 그 여인과 1년 가까이 살지만 결국 마음을 얻지 못해 헤어지는 내용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 "함초와 나문재 같은 식물이 넓게 깔린 장엄한 자줏빛 펄"이 '압권'인 석모도였다. 함초는 퉁퉁마디의 별칭이지만, 붉게 물드는 염생식물을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으로도 쓰인다.
주인공이 떠난 여인을 그리워하다 꿈을 꾸는 장면에도 "넓은 갯벌엔 무리 지어 자생한 자줏빛 함초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주 넓은 자주색 비로드 치마가 펼쳐진 것 같다. 하늘도 온통 함초잎 빛깔이다. 해는 이미 바다로 떨어졌다"는 문장이 있다. 함초는 두 남녀가 처음 만난 배경이자 소설에 강렬하면서도 비극적인 색채를 주는 이미지로 쓰이고 있다.
염생식물 군락은 한번 보면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인지 '꽃게 무덤' 말고도 여러 소설에 등장하고 있다. 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는 지금은 사라진 수인선(水仁線) 협궤열차를 무대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협궤열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너른 개펄에 선연한 붉은빛으로 가득히 돋아 있는 나문재의 군락"이 나오고 있다. 작가는 "그것은 마치 하늘의 날염 공장에서 그 빛깔만 골라 몇 만 평의 천을 일부러 갖다 널어놓은 것같이 보였다"고 묘사했다.
대표적인 염생식물인 퉁퉁마디, 나문재, 해홍나물, 칠면초 등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보면 조금씩 다르다. 이 중 가장 흔한 것은 해홍나물로, 서해안 일대 육지 가까운 쪽 갯벌에 있는 염생식물은 해홍나물인 경우가 많다. 염생식물이 자라는 곳은 유난히 게나 갯지렁이 구멍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염생식물이 다른 식물이 꺼리는 갯벌에 들어가 서식지 역할을 하는 등 생태계를 풍부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해홍나물(왼쪽), 칠면초
퉁퉁마디는 줄기가 통통하면서도 마디가 뚜렷해 비교적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요즘엔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으면서 마구 채취해 서해안 갯벌에서도 잘 살펴야 몇 개체 볼 수 있는 식물이다. 대신 염전 옆에서 대량 재배해 팔거나 가공식품을 만들고 있다. 마디를 따서 입에 넣으면 짠맛이 나지만 약간 단맛도 느껴져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나머지 세 가지는 육지 쪽 갯벌에서 바다 쪽으로 나문재, 해홍나물, 칠면초 순으로 자란다. 나문재는 50~100㎝로 자라 다른 염생식물에 비해 키가 크다. 봄에는 전체적으로 녹색을 띠다가 가을에 붉게 물든다. 어릴 때는 잎이 가늘고 길어 어린 소나무처럼 보이고 가을엔 열매가 별사탕 모양이라서 구별할 수 있다.
나문재(왼쪽), 퉁퉁마디
해홍나물과 칠면초는 참 구별하기 어렵다. 해홍나물은 육지에 가까운 갯벌에서, 칠면초는 갯벌 깊숙이 들어가 자란다. 그래서 칠면초를 만나려면 장화를 준비하거나 신발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두 식물의 구별 포인트는 칠면초 잎은 곤봉처럼 뭉뚝하고, 해홍나물 잎은 길쭉하고 끝이 뾰족하다는 점이다. 잎을 잘라 보면 칠면초는 원형이고 해홍나물은 반원형이다. 또 곁가지가 땅에서 5㎝ 이상 떨어져서 나오면 칠면초, 땅에 거의 붙어서 나오면 해홍나물이다. 하지만 여러 번 공부해도 실제로 현장에 나가보
면 또 헷갈린다. 어중간하게 보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고수들은 자주 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멀리서 보아도 해홍나물인지 칠면초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꽃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저자 이재능씨는 "멀리서 뛰노는 아이들 중 자기 자식을 금방 찾아내고 아득한 곳에서 오는 이가 그인지 아닌지 아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결국 사랑과 관심"이라고 했다.
권지예, 꽃게무덤, 윤후명, 협궤열차
이재능 꽃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1, 2, 3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6/20191106041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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