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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김철중의 생로병사] 유전자 검사로 팔자 고치는 세상 오나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전문의

입력 2019.11.12 03:14


예전엔 특정 질병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 있어도 속절없이 당해
이제는 유전자 검사 발달로 내게 맞는 다이어트 방법도 찾아
암·심장병 등 몸속 위험 유전자가 몸 밖으로 나와서 삶을 바꾼다


결혼해서 갓 낳은 딸을 둔 회사원 김모(33)씨는 최근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유전자 검사도 받았다. 작은아버지가 젊은 시절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만성 심장 질환은 나이 들어 생기고, 선천성 심장병이었다면 어린 시절에 문제가 됐을 텐데, 왜 삼촌은 20대 후반에 심장병으로 요절했을까. 혹시 우리 집안에 심장병과 관련된 유전적 취약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검사에 나선 계기다.

김씨는 'MYH7'이라는 유전자 변이가 나왔다. 이 변이는 가족성 비후성 심장 근육병을 일으킨다. 심장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굵어져 심장 박동으로 피가 나가는 출구를 비좁게 만든다. 나중에는 심장 박출 출구가 막혀 급사 우려가 생긴다. 집안 대대로 유전자 변이가 이어진다고 하여 병 이름 앞에 '가족성'이라는 말이 붙었다. 분명 삼촌도 이 변이 때문에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김씨는 요즘 유전자 검사 기관서 나오는 다양한 사례 중 하나다. 가장으로서 건강하게 가정을 꾸려갈 책무가 있기에 김씨는 심장 검진에 철저히 임할 계획이다. 격렬한 운동을 하면 굵어진 심장 근육이 펌프 출구를 막을 확률이 높기에 과격한 운동은 자제키로 했다. 운동선수가 경기 중 심장병으로 돌연사한 경우, 상당수가 이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몸속에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가 있어도 알 수 없어 속절없이 당했다. 이제는 유전자 검사가 발달해 변이를 미리 알아내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부정맥 관련 유전자만도 십 수 가지를 찾아낸다. 주변에 깡마른 체구인데 의외로 콜레스테롤치가 높아 강하제를 먹는 이들이 있다. 대개 가족성 고(高)콜레스테롤혈증이다. 이 집안의 '기름진' 내력도 유전자 검사로 걸러낼 수 있다.


똑같이 담배를 피우고 살았는데도 어떤 이는 폐암에 걸리고 누구는 폐암을 피해 간다. 이것도 내재된 폐암 위험 유전자와 관련 있다고 본다. 자영업자 이모(50)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줄곧 담배를 끼고 살았다. 그는 최근 유전자 검사를 통해 계속 흡연할 경우 폐암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은 유전자형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미 담배를 오래 피웠기에 폐암 발생 가능성은 비(非)흡연자보다 높지만, 지금이라도 금연할 경우 폐암 발병 가능성이 떨어진다. 이씨는 자신의 유전자 타입을 알고 나서 금연에 나섰다. 매년 저(低)선량 CT로 폐암 검진도 받을 예정이다.

"당신은 유전자 때문에 이런 질병에 걸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처음에는 공포스럽게 느끼지만, 대개는 건강관리 행태를 바꾸는 긍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대장암 발생 가능성이 큰 유전자형이라고 진단받으면 많은 이가 고기 섭취량을 줄이고, 운동 시간을 늘리고, 대장 내시경 검진을 열심히 받는다. 그럼으로써 대장암 발생 확률은 줄어들고, 걸리더라도 조기 발견하여 완치에 이르게 된다.

직장 여성 박모(36)씨는 어릴 때부터 황제, 사과, 고구마 등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었다. 그때마다 살은 빠졌으나, 번번이 요요 현상으로 도루묵이 됐다. 유전자형 분석을 받은 결과, 아니나 다를까 쉽게 살이 찌고 요요 가능성이 높은 타입으로 나타났다. 이런 유전자형은 여러 다이어트법 중 저(低)지방 식이가 잘 맞는다는 점을 알게 됐다. 섭취 칼로리를 줄이기보다, 탄수화물을 적게 먹는 것보다, 유전자는 저지방을 찍었다. 이후 박씨는 운동을 병행하면서 체중 감량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

극단적 경우지만, 미국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유방암 위험 유전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미리 양쪽 가슴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유방암 발생을 원천 차단했다. 과감한 선택을 한 이유는 하나다.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자기 곁을 일찍 떠났지만, 본인은 엄마로서 어린 아이들 옆에 오래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몸속 유전자가 몸 밖으로 나와서 그녀의 삶을 바꾼 것이다.

요즘 검진센터 등에서 다양한 유전자 검사를 하고 있다. 병원에서 전체 유전체를 분석해 볼 수도 있다. 유전자 관련 바이오 회사도 꽤 등장했다.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럽고 유전자 과잉 의존 현상도 벌어질 것이다.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유전자는 곧 우리 삶 안에 자리 잡는다. 팔자려니, 체질 탓이니 하며 살기 힘들어졌다.

앤젤리나 졸리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11/20191111036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