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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일요일 아침 9시면 카페로 직행… '콘센트 쟁탈전' 벌입니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8.11.17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한국에 와서 한 주의 일과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 있다. 일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커피숍에 가서 글을 쓰는 시간이다. 아침 9시면 커피숍으로 간다. 일찍 가야 전기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서다.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도 이 커피숍에서 썼다. 커피 한 잔 옆에 놓고 지나온 인생을 찬찬히 돌이켜보면서 책을 썼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손님 블랙리스트'에 올랐을지도 모르겠다. 밤 10시가 다가오면 슬슬 종업원이 내 옆으로 와서 의자를 정리한다. 지금까지 내 자서전이 15만권 정도 팔렸는데 책을 쓴 장소를 제공해준 커피숍에 인세 일부를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든다.


서울의 커피숍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생산 공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란스럽게 웃고 떠들고 음악까지 흐르고 있어 조용한 공간이라 볼 수는 없으나 커피숍에만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집중이 잘 되고 글도 술술 나온다. 처음엔 조용한 집 놔두고 왜들 이렇게 노트북 끼고 커피숍에 나와 있을까 의아했지만, 이내 나도 그렇게 됐다. 조용히 공부하는 젊은이들도 같은 마음일 것 같다.


아마 내가 평양의 어느 한 커피숍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쓰려 한다면 종업원이 '미친놈'이라면서 당장 나가라고 할 것이다. 평양에서 커피숍은 대체로 젊은 남녀들이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미팅 장소다. 오래 앉아 있어야 한 시간 정도 머문다. 조용히 앉아 책 보는 사람도 없다.

평양 거리에 커피숍이 처음 나타난 것은 2008년 초다. 그전에는 호텔 안에만 카페가 있어 외국인들이나 찾는 호화스러운 장소로 여겨졌다. 커피 한 잔에 큰 잔은 거의 5달러, 작은 잔은 3달러 정도였다. 당시 외무성 국장 수입조차 1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북한 실정에서 커피숍 커피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화장실에 가면 소변으로 다 나가는데 차라리 커피 한 잔 마실 돈으로 고급 냉면 한 그릇 잘 먹자고들 했다.

그럼에도 외무성 등 북한 상류층에서는 커피가 오래전부터 없어서는 안 될 음료였다. 외무성은 2000년대 초부터 아침에 출근하면 물을 끓여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외국에 출장 갔다 올 때면 말보로로스만과 같은 좋은 외국 담배와 함께 커피를 사다 간부들에게 고이는(북에서 '고이다'는 뇌물을 준다는 의미) 게 관례였다. 그런데 2008년 초 평양시의 중심부, 그것도 김일성광장조선미술박물관 건물 한 모퉁이에 커피숍이 들어섰다. 20만달러 정도 투자해 커피숍을 열었는데 커피 한 잔당 3달러에 판매했다. 처음에는 다들 '미친 짓'이라면서 장마당에서 10달러면 커피 한 통을 사는데 누가 3달러짜리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했다. 북한의 경제 구조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장사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커피숍이 대박 났다. 지금까지 물을 끓여 찻잔에 부어 마시던 커피 대신 '쉭' 소리가 나면서 기계에서 뽑아내는 커피라는 소문에 제일 먼저 대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상류층 자제인 대학생들은 부모에게 돈을 받아 커피숍으로 향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 한국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만 보던 한국의 커피 문화를 한번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욕망이 젊은이들을 모여들게 했다. 대학에서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고급 냉면 사주겠다면서 데이트 신청을 하면 응하지 않다가도 커피숍에 가자면 흔쾌히 응했다. 한류의 영향이 젊은 층에 미친 변화를 평양의 커피숍 투자가가 잘 꿰뚫은 셈이다.

'1호 커피숍'의 성공을 보고 너도나도 따라 했다. 지금 평양엔 커피점이나 찻집이 꽤 많이 생겼다. 하지만 아직 평양의 커피점은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장소일 뿐 한국처럼 공부하는 장소는 아니다. 언젠가 평양의 커피점도 공부하는 젊은이로 바글바글할 날이 올까. 그때쯤이면 나도 그 틈에서 글을 쓰고 있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6/20181116017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