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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수업 '뚜꺼먹은 날', 21세 여선생님은 종아리를 때렸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5.11 03:01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지난해부터 대학생들을 모아 '남북동행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탈북민 대학생과 한국 대학생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남북한 차이를 배우면서 통일을 생각해보는 아카데미다. 벌써 수료생이 두 번 나왔다. 며칠 전 아카데미를 수료한 학생들이 충무로역 근처 한 식당으로 나를 초대했다. 오래간만에 만나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음식을 주문하는데 갑자기 식당 전등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학생들이 촛불을 붙인 케이크를 가지고 나타났다. "원장님, 스승의 날 축하합니다!" 그러면서 여름용 페도라(챙이 있는 모자)를 선물로 주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뜬금없이 케이크는 무엇이고 선물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이어서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고 했다. 이어 제자들이 스승의 날 노래를 불렀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가사가 참 좋았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외국에 나가 있어 못 온 학생들은 축하 메시지를 담은 짤막한 동영상을 스마트폰으로 보내왔다. 그제야 나는 한국에서 5월 15일이 스승의 날인데 세종대왕 탄신일에서 따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난생처음으로 스승 대접을 받고 보니 좀 어색했다. 북한에는 스승의 날은 없고 '교육절'이 있다. 일부에선 북한의 교육절이 한국의 스승의 날과 비슷하다고 하나 생겨난 배경이나 성격을 보면 거리가 있다. 교육절은 김일성이 1977년 9월 5일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를 발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 이날 교육 일꾼들과 학생들은 교육 테제 발표의 의미를 되새긴다.

스승의 날은 따로 없지만 북한에서도 종종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드린다. 아버지가 평양건설건재대학 교원이었고 어머니는 평양시 서문인민학교 교원이어서 어렸을 때 우리 집엔 부모님이 가르친 제자가 많이 드나들었다. 대학 입학 때 감사 인사를 하러 오는 제자도 있었고 군대 제대 때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결혼한다면서 신부나 신랑을 인사시키러 오는 제자들도 있었다. 한국처럼 카네이션 꽃을 들고 찾아오지는 않고 집에서 키운 채소나 달걀, 마늘 등을 들고 왔다. 떡이나 닭고기 같은 음식을 들고 오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학급마다 담임선생이 있는데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몇 년 동안 담임선생이 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사제 관계가 매우 끈끈하다. 한국에선 선생님들을 교사라고 부르는데, 북한에선 탁아소 선생님은 보육원, 유치원 선생님은 교양원, 초·중·고와 대학 선생님은 교원 혹은 정식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내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다. 사범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예쁜 여자 선생님이었다. 처음엔 여자 선생님이라 얕보고 부모님께 학교에 간다고 해놓고선 친구들과 책가방을 메고 모란봉에 올라가 놀다 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우리를 찾아 모란봉까지 와 학교로 끌고 갔다. 교실 앞에 쭉 세워놓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라고 하고는 순서대로 지시봉으로 내리쳤다. 너무 아파 "다시는 학교를 뚜꺼먹지(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북한식 표현)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면 또 '뚜꺼먹었다'.

선생님은 어김없이 우리를 잡으러 왔고 , 오후 늦게까지 그날 공부를 다 시킨 후 집으로 보냈다.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들은 밤새워서라도 교실에 잡아 놓고 숙제를 끝내게 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선생님의 그런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내가 초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나이 50대 후반에 북한을 떠나 남한에서 스승의 날을 맞고 보니 옛 스승 생각이 나 절로 눈물이 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10/20190510022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