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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맥주가 술? 北에서는 청량음료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4.20 03:00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한국에 처음 왔을 땐 한국 맥주가 너무 밍밍해서 수입 맥주를 많이 마셨다. 그러다가 요즘은 지인들 권유로 소맥도 가끔 마시긴 하는데 술 섞는 문화가 영 낯설다. 한국 사람들에게 맥주에 왜 굳이 소주를 섞어 먹느냐고 물어봤다. 여러 답이 나오는데 한국 맥주가 싱거워서 여자들이 마시긴 좋은데 남자들이 마시기엔 좀 약해 소주를 섞어 맛을 강하게 한다는 설명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과 술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 북한의 대동강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맛있느냐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없지만 맥주 얘기만 나오면 흥이 난다. 맥주만큼은 한국보다 낫다고 자부한다.


한국의 맥주 시장은 3개 기업이 점유하고 있다는데 북한은 한국보다 맥주 생산 기업이 많다. 평양, 룡성, 봉학, 금강, 매봉, 제비 등 브랜드도 다양하다.



그중 북한 노동당에서 운영하는 룡성맥주 공장에서 생산되는 룡성맥주가 제일 좋은 맥주다. 군대에서는 매봉맥주제비맥주를 생산한다. 제비맥주는 비행사들만 마신다. 그래서 상표도 하늘을 나는 '제비'에서 따왔다. 맥주 공장은 많지만 공급량이 수요를 따라가질 못한다. 당국에선 맥주도 식량처럼 배급표를 만들어 가족 구성원 중 성인 남자 수에 맞춰 한 달에 몇 L씩만 마시라고 한다. 맥주를 맛있게 먹는 나름의 비법도 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생맥주를 받아 오시면 생콩을 띄워 두셨다. 그렇게 해두면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거의 일주일 동안 아껴 마셨다.

북한 맥주 맛을 획기적으로 바꾼 계기가 있다. 김정일이 2001년 푸틴을 만나려고 열차로 시베리아를 여행하면서 러시아산 '발티카' 맥주를 맛봤다. 김정일은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설비를 들여다 좋은 맥주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담당자들이 맥주 공장 설비를 사러 독일에 갔지만 김정일이 준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때 독일 맥주 공장 관계자가 자신들의 설비를 가져간 영국의 어셔 양조 회사가 중고로 설비를 팔려 한다는 정보를 알려 줬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서 중고 맥주 설비를 들여왔다. 원래 독일 설비였기에 맛은 독일 전통 맥주에 가까웠다. 이게 바로 대동강맥주다. 이런 역사 탓인지 평양에 있는 외국인 중에서도 독일과 영국 외교관에게 인기가 높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동강맥주 맛이 좋은 이유는 양강도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사용하고 맥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강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홉을 생산하기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꼽은 곳이다. 대동강맥주는 쌀과 보리의 혼합 비율에 따라 번호를 붙이는데 제일 흔한 맥주가 2번과 11번이다. 대동강 흑맥주는 6번, 제일 좋은 맥주는 12번이다. 나는 11번을 제일 좋아했다. 같은 대동강맥주라고 해도 외화를 벌기 위해 호텔이나 외화 상점, 외화 생맥줏집에 들어가는 건지 일반 주민들이 이용하는 생맥줏집에 공급되는 건지에 따라 가격과 질이 달라진다.

한국 사람 중 개성공단에서 대동강맥주를 맛봤다는 사람이 꽤 있던데 개성공단에 공급되는 대동강맥주는 최상위급이다. 일반 평양 시민이 북한 화폐로 사서 마시는 생맥주는 완전히 발효되기 전에 알코올을 섞은 것이다. 그래서 몇 컵만 마셔도 머리가 아프고 숙취도 심하다. 한국에서는 맥주를 술이라고 생각하는데 북한에서는 사이다나 콜라 같은 청량음료로 여긴다. 북한에선 알코올 도수가 30%는 넘어야 술로 친다. 남한보다는 확실히 독주를 좋아한다. 맥주는 16~17세쯤 되면 마시기 시작한다. 만 17세에 군에 입대하는데, 입대 전 집에서 동창들과 조촐한 환송식을 한다. 이때 부모들이 10년(군 복무 기간) 뒤에나 집으로 다시 오겠다면서 아들과 친구들에게 맥주를 내놓곤 한다. 어서 남북 관계가 좋아져 한강공원에 앉아 대동강맥주를 마시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9/20190419018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