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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北에선 은행에 저금하면 바보… 뇌물 없인 못 찾으니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4.06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2016년 12월 국정원 안가에서 나오면서 제일 먼저 주민등록증은행 계좌를 만들었다. 한국에 온 지 5개월 만이었고,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절차였다. 은행 직원이 하라는 대로 여러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하니 얼마 후 은행 통장체크카드가 나왔다. 며칠 후 첫 정착금이 통장에 들어왔다. 그날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고 카드로 결제해 보니 그제야 평생 가져보고 싶었던 은행 카드가 생겼다는 것이 실감 났다.

12년 동안 유럽에서 외교관으로 생활하면서 점심 초대를 받았을 때 외국인들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북한에서는 국가기관이나 기업만 거래용 은행 계좌를 틀 수 있다. 개인은 이체를 할 수 없는 저금통장만 가지고 있다. 예컨대 평양 사는 사람이 함흥에 있는 고모에게 돈을 보낸다면 인편으로 보내야 한다. 월급이 현금으로 지급되고 물건도 다 현금으로 사니 은행 계좌가 있을 필요가 없다. 몇 년 전 외화 지불 시에만 사용하는 '나래카드'라는 결제 카드가 나왔지만 외화를 먼저 충전해 넣어야 사용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집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은행에 저금하지 않는다. 무역은행 같은 데에 1000달러를 저금하고 그 돈을 찾아 쓰자면 200~300달러 정도는 은행 간부한테 줘야 찾을 수 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1등 바보, 돈을 갚는 사람은 2등 바보, 빌려준 돈을 받겠다고 찾아다니는 사람은 3등 바보'라는 말이 있다.

북한 돈이든 외화든 다 집에 보관한다. 돈 있는 북한 엘리트층이 10만명 정도 된다고 보면, 한 사람이 집에 1만달러씩만 보관하고 있다고 쳐도 집에 있는 외화가 10억달러가 넘는다. 외교관들이 해외에서 승인 없이 개인 계좌를 몰래 가지고 있으면 국가반역죄를 범하는 게 된다. 외교관 월급을 현금으로 주는데 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국 몰래 외국인과 돈거래를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돼 정보 당국에 매수됐는지부터 의심한다.

영국에서 외교관 생활할 때 개인 계좌가 없었을뿐더러 2016년부터는 대사관 자체도 모든 영국 은행에서 퇴출당해 대사관 계좌도 없었다. 2003년 런던에 처음 북한 대사관을 개설할 때, 주변 HSBC은행에 찾아가 대사관 계좌를 열겠다고 하니 지점장이 나와 모든 편의를 다 제공해 줬다. 그런데 2005년 9월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 있던 북한 자금 2400만달러를 동결시키자 영국 HSBC은행도 놀라 북한 대사관 계좌를 폐쇄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다른 영국 은행을 찾아다녔는데 처음에는 개설해 주었다가 몇 달이 지나면 무슨 영문인지 없애 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1년에 몇 번씩 은행을 바꾸다 마지막에 찾아간 것이 인도 바로다(BARODA)은행 런던 지점이었다. 같은 아시아 국가여서인지 흔쾌히 계좌를 열어줬지만 2016년 2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인도 은행도 계좌 폐쇄를 요구했다. 혈맹 관계인 중국은행(Bank of China) 런던지부에도 찾아가 봤지만 대북 제재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다. 결국 2016년 북한 대사관은 은행 계좌가 없는 대사관이 됐다. 자동 이체로 내던 전화세, 수도세, 쓰레기세 등 모든 세금도 현금을 들고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서 내는 수밖에 없었다. 속사정 알 길 없는 우체국 직원은 자동 이체로 하면 되는데 왜 매번 힘들게 현금을 들고 다니느냐며 의아해했다. 대사관 경비도 주변국에 주재한 북한 대사관 직원이 직접 가지고 오거나 모스크바나 주변 나라에 가서 가져와야 했다.

전 세계가 인터넷과 금융망으로 더욱 치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지금 북한만 핵무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로 역주행하는 것 같다. 휴대폰에 NFC 카드 깔아서 식당에서 결제할 때마다 북한 사람들도 언제쯤이면 개인 계좌를 갖고 스마트폰으로 결제할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5/20190405018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