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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화장실 열악한 北… 남자는 왼쪽 산, 여자는 오른쪽 산으로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3.23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한국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이다.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유럽의 고속도로 휴게소도 많이 가봤지만 한국처럼 청결하고 인테리어 잘 된 곳은 보지 못했다. 특히 화장실에 붙여 놓은 문구들이 맘에 든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것은 장총이 아니라 권총입니다. 한 발짝 더 가까이 와주세요'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큼 행복해집니다' '저를 깨끗이 사용하시면 오늘 본 것을 평생 비밀로 하겠습니다'…. 기지 넘치는 문구 앞에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된다.



화장실을 유심히 살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북한에서 외국 손님을 인솔해 다니면서 화장실 때문에 골머리 앓은 적이 여러 번 있다. 평양에서 개성, 판문점으로 가자면 차로 거의 3시간 이상 걸리는데 고속도로에 외국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 휴게소가 하나밖에 없다. 그나마도 자동 수세식이 아니고 일을 보고 물을 부어야 하는 변기다. 평양에서 원산, 함흥, 신의주로 가는 고속도로에도 외국인용 휴게실이 몇 군데 안 된다.


외국 손님을 데리고 지방으로 나갈 때는 사전에 이 사실을 알려주고 출발 전 호텔에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떠나게 하는 게 철칙이다. 농촌에 갈 때는 해당 마을에 들어서기 전 인적이 드문 산 옆에 승용차를 세워 놓고 외국인들에게 산에 올라가 볼일을 보게 했다. 농촌에도 화장실이 있지만 변기 없이 바닥에 구멍만 뚫은 구조여서 외국인들이 기겁하고 그냥 나왔다.

한번은 평양 주재 유럽 외교관 수십 명을 인솔해 북쪽 끝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까지 승용차로 간 적이 있었다. 외국 여성들이 몇 명이 있어 몇 시간에 한 번씩 숲이 좀 우거진 산이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남자들은 왼쪽 산으로, 여자들은 오른쪽 산으로 올려 보냈다.

북한에서 24시간 물이 나오는 화장실은 평양에 있는 외국인 전용호텔 화장실밖에 없다. 지방 호텔에 머물 땐 화장실을 쓰고 난 뒤 반드시 욕조에 미리 받아 놓은 물을 떠서 부어야 한다고 일러줬다.

해외 후원을 받아 농촌의 초·중학교에 화장실 짓는 사업을 하다가 중앙당의 문책을 받은 적도 있다. 2000년대 아일랜드의 '월드와이드 콘선(Worldwide concern)', 영국의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등 인도주의 지원 단체들이 북한 농촌 학생들의 설사 증상을 막기 위해 지원 사업을 한 적이 있다. 북한 사정을 잘 모르는 유럽인들은 '손을 깨끗이 씻자요(씻읍시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티셔츠를 학생들에게 나눠 줘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꼭 손을 씻게 했다. 그래도 설사 증세가 완화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수질 전문가가 와서 원인을 분석해 보니 학교 화장실 바닥을 방수 처리하지 않아 불순물이 땅으로 스며들었는데 아이들이 그 옆에 있는 우물물로 손을 씻었던 것이었다. 유럽 국가들이 원조해 화장실을 다시 짓고 수도관 시설도 정비했다. 외국 인도주의단체들은 이 공사를 '화장실 협조'라고 이름 붙여 지방 행정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지방당에서는 중앙당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화장실을 건설하는 공사를 벌여 놓았다면서 외무성이 나서서 국가 위신을 구겼다고 보고했다. 중앙당 해당 부서에서는 "북한 어린이들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고 선전해 왔는데 학교 화장실을 건설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면서 현장을 둘러보러 내려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중앙당 담당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가면서 창피하니 '화장실 협조'란 말만 '물 위생 협조'로 바꾸라고 했다.

화장실은 그 나라의 발전과 문화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통일이 되면 할 일이 많겠지만 북한 주민들의 문화 수준을 이른 시일 안에 한국 수준으로 올리려면 화장실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2/20190322015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