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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평양냉면, 서울과 평양의 차이는 육수의 간장… 고명도 북한식은 높이 쌓아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3.02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한국에 와서 그리운 것 중 하나가 평양냉면이다. 서울에 있는 유명하다는 냉면집은 거의 가봤는데 내가 생각하는 평양냉면은 없었다. 경호원들도 '진짜 평양냉면은 어떤 맛이냐' 궁금해하기에 한 번은 아내가 집에서 평양냉면을 만들어 대접했다. 다들 지금까지 먹는 냉면과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평양냉면 만드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걸로 진정한 평양냉면 맛을 내기는 어렵다. 육수에 비밀이 숨어 있다. 핵심은 간장. 북한에서는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를 넣고 거품과 기름을 건져내면서 먼저 끓인 다음 고기가 익으면 건져 낸다. 이 육수에 간장을 넣어 잠깐 더 끓여 무맛과 간장 맛을 낸다. 살림이 좀 넉넉한 집에서는 동치미 국물까지 섞는다.


한국 육수는 소금으로 간을 해 맑지만, 북한 육수는 간장이 들어가 약간 탁하다. 서울에서 냉면을 먹을 때마다 지인들에게 간장으로 육수 맛을 맞춰 보라고 권하지만, 어린 시절 시골에서 국수 먹는 맛 같다며 간장을 치지 않았다.

다음으로 눈맛이다. 평양냉면은 '꾸미(고명)'를 높이 쌓는다. 삶은 계란과 함께 튀긴 계란·고추· 등을 가늘게 썰어 와 함께 올린다. 먹기 전부터 눈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국수 위에 고명으로 삶은 계란과 고기, 김치 몇 조각 올리는 한국의 평양냉면과는 다르다. 평양에서 냉면 맛이 제일 좋은 식당은 옥류관, 고려호텔, 창광원이다. 저마다 자기 식당 냉면이 제일 맛있다고 하는데 내 입맛엔 옥류관이 최고다. 육수 때문이다. 옥류관에는 북한에서 제일 큰 육수 가마가 있는데 소고기·닭고기·돼지고기 뼈를 넣고 24시간 끓이면서 거품과 기름기를 걷어 낸다. 육수 맛은 가마 크기와 여러 가지 고기 뼈를 얼마 동안 우려 내는가에 달렸다. 김정은도 냉면 육수는 옥류관에서 가져간다고 한다. 옥류관은 낮 12시와 오후 6시 하루 두 번 냉면을 파는데 국수양이 제한돼 있어 사전에 표를 사야 한다. 옥류관 건너편에 국수 표 판매소가 있는데 오전 9시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 국수 한 그릇 먹자고 아침부터 몰려드는가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내막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북한에는 모든 상품에 국정 가격(국가가 정한 가격), 야매 가격(시장 가격), 수출 가격이 있다. 옥류관 국수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인 2013년까지만 해도 국수 한 그릇이 국정 가격으로 3000~4000원 정도 했다. 그 가격으로 국수를 먹으려면 아침부터 표 판매소에서 줄을 서야 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국정 가격 국수 표를 만원 이상 주고 산다. 암거래가 이뤄지는 것이다. 아침에 줄을 서 표를 구매한 사람들은 낮 12시가 되면 옥류관 정문 앞에서 시장 가격으로 국수를 먹으려는 사람들에게 되팔아 차액을 챙긴다. 옥류관 안에는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 등 외화로 운영하는 방이 따로 있다. 수출 가격으로 국수를 파는 셈이다. 이 방은 조용하고 대기 시간도 짧아 돈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결국 한 국숫집에서 같은 국수를 먹으면서도 세 가지 가격 시스템이 돌아가는 셈이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옥류관에서 국정 가격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나이 든 퇴직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연금이 보장되지 않는 북한에서 은퇴자들에게는 옥류관 국수 표라도 사서 되파는 게 하나의 생계유지 수단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정 가격은 남아 있게 됐다.


부패의 온상이 되긴 했어도 옥류관 국수의 고유한 맛은 변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평양냉면은 평화의 상징이 됐다. 서울에서도 평양냉면 열풍이 일어 냉면 한 그릇 먹으면 한반도에 평화에 기여하는 것 같은 착시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9월에 이선권의 '냉면 목구멍 발언'으로 이어져 친구들 사이에 냉면집에 가면 농담 삼아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 하기도 한다.

분단의 아픈 역사 속에서 평양냉면의 운명도 순탄치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어서 통일이 돼 내 차를 몰고 옥류관으로 가 원조 평양냉면을 먹는 그날을 꿈꿔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1/20190301014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