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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기적처럼 만난 5촌 당숙 가족과 명절 보내… 北에선 설에 안 지냈던 차례도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2.23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지난 설 어김없이 이어지는 귀성 행렬을 보고 나도 한국 생활에 이제 꽤 익숙해졌구나 싶었다. 북한에선 음력설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처음에 이 풍경이 꽤 낯설었다. 김일성은 음력설 쇠는 것을 미신 숭배처럼 여기고 "봉건 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며 1967년 양력설만 남기고 민속 명절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러다가 1989년부터 음력설을 다시 명절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음력설도 잘 보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매체에선 음력설에 연날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도 세배하고 가족과 덕담 나누는 일은 양력 1월 1일에 한다.

그렇다고 양력설에 고향을 가지는 않는다. 북한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데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당국으로부터 통행증(여행증명서)을 발급받아야 하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나 형제 사망, 형제 결혼식 때나 통행증을 받아 여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에 와서 처음 맞은 음력설엔 뭘 할까 고민하다 가족과 영화관에 갔다. 명절이 영화관 성수기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두 번째 설은 곤지암 스키장으로 갔다. 고향 가는 대신 콘도에서 명절 즐기는 이들이 꽤 많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세 번째로 맞이한 올 설은 내게 정말 의미 있는 명절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남한에서 설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친척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를 출간한 후 6·25 때 남한으로 내려온 5촌 당숙(큰아버님)에게 연락이 왔다. 80대 고령의 큰아버님이 542페이지 두꺼운 내 책을 끝까지 읽어 보고 내가 5촌 조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였다. 그런데 기적같이 만난 큰아버님이 지난해 추석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생전에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에 그렇게도 가보고 싶어 하시다가 북에서 내려온 조카인 나를 만나 보시고 소원을 풀었다고 힘을 놓으신 것 같다.

살아계실 때 더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큰아버님은 가셨지만 남한에서 외롭게 지내던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일가친척은 남았다. 이번 설 전날 큰어머니가 차례를 같이 지내자고 연락하셨다. '차례'.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큰아버님 제사와 관련된 집안 행사일 것이라는 짐작은 갔다. 인터넷 사전을 보니 설과 추석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는데 북에선 제사라는 단어만 쓴다. 설날 아침 수원에 있는 큰어머니 댁에 모여 6촌 형제, 조카들과 차례를 지냈다. 큰어머님이 덕담을 하시고 우리 애들에게 세뱃돈도 주셨다.

한국의 차례와 북한의 제사는 대체로 비슷했는데 약간 다른 부분도 있었다. 북에서는 제사 때 모든 조상에게 술잔을 하나 쓰는데 한국에서는 조상 수만큼 술잔을 쓴다고 한다. 차례 때 조상이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문도 열어 놓는다고 한다는데 북에서는 없는 문화다.

한국으로 오고 제사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맏이다 보니 북에 있을 때 부모님 기일과 생일, 추석날 제사를 내가 주관했다. 해외 대사관으로 발령 나면 동생이 대신 제사를 모셨다. 그런데 한국으로 갑자기 귀순하다 보니 동생과 부모님 제사를 누가 모실지 얘기하지 못했다. 내가 맏이니 한국에서 제사를 지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형제 사이에 합의하지 않고 집안 제사를 일방적으로 가져오면 두 곳에서 제사를 모시게 돼 부모님이 혼란스러우실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지난 설을 앞두고 아쉽게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하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정례적으로 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면 남과 북이 생존한 형제들 사이에 조상 제사를 누가 모실지 서면으로라도 합의할 수는 없을까. 그러면 하늘나라에 계시는 조상도, 떠나온 이나 남은 이도 마음이 한결 편해지지 않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2/20190222016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