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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백화원초대소 묵은 올브라이트는 침실에 방음 텐트… 文대통령도?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2.16 03:00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며칠 전 북한 백화원초대소 소장이 부정부패 혐의로 공개 처형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백화원초대소는 북한의 '1호 영빈관'으로 국빈급 인사들이 이용하는 숙소다. '1호'라는 말은 최고 영도자, 즉 김정은이 쓰는 시설에 붙는다.



'백화원(百花園)'이란 이름은 초대소 안팎에 100여 종류의 꽃이 심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경치도 매우 좋다. 김정일 시절 북한에선 백화원 외부 호수 정경부터 비춰주며 김정일의 활동을 보여주는 선전 영화가 많았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가본 적도 없고 위치도 모르지만, 눈에는 매우 익숙한 곳이다.

김정은이 평소에 사무를 보는 3층 서기실(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관)에서 초대소까지는 김정은 전용 '1호 도로'가 대동강변을 따라 있다. 승용차로 10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초대소 바로 옆에는 김정은 전용 '1호 비행장'이 있다. 이러한 '1호 초대소'를 관리하는 소장은 북한에서 특급 비밀로 분류되는 김정은의 동선을 미리 알고 있다. 김정은의 최측근 인물이란 얘기다.

나는 딱 한 번 백화원초대소에 간 적이 있다. 2001년 5월 예란 페르손 전 스웨덴 총리 방문 때였다. 김정일과 페르손 총리가 백화원에서 작별 오찬을 했는데 통역 요원 중 하나로 참석해 김정일과 같은 식탁에 앉았다. 영어 통역들이 배석했는데 김정일 통역은 김정일 전담 통역원 김철이 맡았고, 나는 당시 외무상이었던 백남순크리스 패튼 유럽연합 대외관계 담당 위원의 통역을 맡았다. 지금 외무성 부상인 최선희도 내 옆에 앉아 통역했다.

거의 2시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데 김정일의 노회한 술수에 탄복했다. 나는 스웨덴 총리 영접상무조(TF) 책임자로 방문 일정을 세심하게 작성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런데 스웨덴 총리가 도착한 후에도 김정일은 언제 어디서 만날지 외무성에 알려 주지 않고 김영남 상임위원장에게 먼저 그를 만나라고 지시했다. 초대소에 도착한 스웨덴 총리는 김정일과의 만남이 잡혀 있지 않다는 걸 알고 노발대발하면서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공식 면담을 거부했다. 외국 정상이 모든 일정을 거부하자 당황한 강석주 1부상이 김정일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그 얘기를 들은 김정일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자기가 백화원초대소로 가 스웨덴 총리의 노여움을 풀어주겠노라 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연회장으로 들어와 총리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한 말이 기억난다. "오늘 페르손 총리가 앉을 이 좌석은 역사적인 자리이다. 6·15 남북 공동선언 때 이 좌석에 김대중 대통령이 앉았다. 여기에 앉으면 역사가 창조되곤 했다. 그래서 일부러 페르손 총리를 이 자리에 모셨다." 김정일은 이미 초대소에서 페르손 총리와 작별 연회를 할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해 놓았던 것이었다.

연회에 앞서 스웨덴 측은 총리가 좋은 포도주를 준비해 가지고 왔다며 연회 때 마시자고 제안했다. 초대소 소장은 알았다고 하면서 스웨덴 측이 건넨 포도주를 받았지만 북측에서 준비한 포도주를 내놓았다. 김정일이 직접 마시는 포도주라면 독성이 있는 건 아닌지 사전에 검사해야 하는데 외국 정상이 준비해 가지고 온 걸 검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002년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가 왔을 때는 일본 측에서 비행기로 생수까지 다 싣고 왔다. 백화원초대소 생수는 한 병도 입에 대지 않았다. 북한 관련자들은 "쪽발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 거냐"고 격분했으나 일본 측에 공식 항의는 하지 않았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초대소에 왔을 때 미국 측은 숙소 침실에 방음 텐트를 쳤다. 올브라이트는 관계자들과 만날 때 이 텐트 안에 들어 가는 바람에 북한에서 도청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등 한국 대통령 3명이 백화원초대소를 다녀왔다. 한국 대통령도 침실에 방음 텐트를 치고 서울에서 생수까지 날라다 마셨을까. 앞으로 김정은이 한국을 답방하게 된다면 방음 텐트와 생수까지 다 가지고 내려올까. 모르긴 몰라도 보안과 관련해서는 북한이 더 주도면밀할 듯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15/20190215015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