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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불멸의 이순신' '하얀 거탑' 정말 감명… 한류에 빠진 北, 드라마 제작 엄두도 못내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1.19 03:00 | 수정 2019.01.19 03:13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한국에 와서 제일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실컷 드라마 보기였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3년 가까이 됐는데 그간 본 TV 드라마는 '불어라 미풍아'밖에 없다. 국정원 안가에서 생활하면서 밖에 나가지 못하니 할 일이 없어 우연히 TV를 보다가 탈북민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라 보게 된 드라마였다. TV를 틀면 채널이 너무 많아 이것저것 돌리다가 보면 결국 뉴스 채널이나 스포츠 채널을 보게 된다.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본 한국 드라마 얘기를 하면 대부분 그걸 못 봤다고 했다. 한가하게 드라마나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속으로 뭐가 그리 바빠 드라마도 안 보고 사는가 의아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나도 그렇게 됐다. 한국 사회는 너무 역동적이어서 드라마 말고도 재미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투성이였다.

북한에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가 소개된 시기는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였다. 나는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기 때문에 남들이 한국 드라마를 볼 때 한참을 안 보고 있다가 2000년쯤에야 흥미 삼아 접하게 됐다. 제일 먼저 본 드라마가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내 이념적 기초였던 반일, 애국 충정, 충효 사상이 다 들어가 있어서 정말 재미있었다. 사실 '한국산'이라는 것만 떼면 북한 드라마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밤을 홀딱 새워 보다가 다음 날 출근해 거의 졸다시피 했다. 그다음 '겨울연가' '가을 동화' '풀 하우스' '파리의 연인'을 봤다. 사랑 이야기라 볼 때는 푹 빠졌는데 여운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한 것이 '하얀 거탑'이란 드라마였다. 이걸 보면서 한국의 의료 체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게 됐다. 제조업이 발전했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보건 의료 체계가 그렇게 잘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대장금'도 감명 깊게 본 드라마다.



북한에서 유통되는 한국 드라마는 중국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조선족들 사이에서 히트 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장마당에서 사거나 돈을 주고 빌려 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친척이나 친구한테 무료로 빌려 본다. 다 보고 돌려줄 때는 너무 바쁘거나 컴퓨터가 고장 나 못 봤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래야 훗날 109상무조에 발각돼도 안 봤다고 잡아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 드라마는 체제 선전용이기 때문에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북한에서는 드라마를 '텔레비죤 연속극' 혹은 '텔레비죤 소설'이라고 부른다. '텔레비죤 연속극'은 TV 제작자가 모든 콘텐츠를 새롭게 만든 작품을 가리키고, '텔레비죤 소설'은 이미 있던 소설을 TV 드라마로 만든 걸 말한다. 북한에도 여러 번 반복 방영해도 사람들이 계속 다시 보는 인기 드라마가 있다. 내가 여러 번 본 북한 드라마는 '석개울의 새봄' '첫 기슭에서' '백금산'이다. 체제 선전용임에도 북한 주민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드라마다. 북한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6·25전쟁 후 1950~60년대를 다룬 드라마들이다. 지금보다는 훨씬 정치 환경이 자유로울 때라 그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는 것 같다.

북한에선 원래 영화가 인기였는데 1990년대 초부터 TV 드라마가 활성화됐다. 농업협동조합 결성 과정을 보여준 '석개울의 새봄'이 큰 인기를 끌면서 김정일이 드라마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일부 영화배우는 TV 드라마 제작단으로 옮겨 일했다. 큰 재 미는 못 봤다. 일부 작가가 1980~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을 내놓았지만 북한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인기를 얻지 못했다. 최근에는 북한 주민들이 '한류'에 너무 빠져 있어 북한 드라마 제작자들이 작품을 만들 엄두도 못 낸다. 새로 나오는 작품은 거의 없고 나와도 인기를 못 끈다.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는 암 진단을 받은 사람과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18/201901180136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