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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아무튼, 주말] 北 설날은 '술날'… 31일부터 직장 동료와 사흘 간 술에 절어 있기도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8.12.29 03:01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크리스마스날 방송 녹화 촬영 끝내고 광화문광장과 서울시청 앞을 거닐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크리스마스트리는 있었지만 유럽에 주재할 때 느꼈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한국에 기독교인 비율이 20%를 넘는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썰렁한 듯하다. 캐럴도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해서 맘대로 틀어놓지 못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같이 일하는 젊은이들이 자그마한 선물과 크리스마스카드를 써줘 마음은 훈훈했다.

이제 다음 주 화요일이면 새해다. 한국에 와서 세 번째로 맞는 새해다. 한국은 양력 1월 1일을 '신정'이라고 하던데 처음 듣는 말이었다. 북한에서는 '' 혹은 '새해'라고 말한다. 새해 인사법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새해를 축하합니다'고 한다. 어릴 때 연말이 되면 우편엽서 몇십 장을 사서 친척 어른과 선생님들에게 '새해를 축하합니다'고 써보내곤 했는데 이젠 그런 문화가 없어졌다. 북한에서도 젊은 세대는 휴대폰으로 새해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설날이 다가오니 북에서 설을 쇠던 때가 떠오른다. 북에선 새해를 앞둔 며칠 전부터 직장별로 '명절 공급'을 준다. 외무성의 경우 직원들에게 돼지고기 1㎏, 소주 2병, 설탕 1㎏, 콩기름 3L를 주었다. 힘 있는 기관은 귤 한 박스(3㎏)씩 주는 데도 있다. 힘없는 기관이라 해도 직원들에게 소주 한 병씩은 준다.


12월 31일부터 1월 3일까지는 '특별경비주간'으로 선포한다. 31일 오후 조직별로 관련 회의를 열고 명절 기간 근무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고 주의 사항을 강조한다. 설날에 술을 너무 마시고 길거리에서 자다가 얼어 죽거나, 사무실이 추워 술을 마신 채 난로나 연탄불을 켜놓고 자다가 가스 중독이나 화재로 죽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12월 31일엔 직장 부서별로 망년회를 하는데 외무성의 경우 국별로 국장 집에서 한다. 내가 있던 유럽국은 2016년 2월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로 있다가 간암으로 사망한 김춘국 국장 집에서 15년 동안이나 망년회를 했다. 그가 15년 동안 국장이었기 때문이다. 50여 명이 국장집에 몰려가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밤늦도록 노래 부르다가 TV로 새해 종 치는 것을 같이 보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일부는 술을 너무 마셔 아예 국장집에서 자고 새해 첫날 아침에 귀가했다. 설날 연휴는 1~2일 이틀이다. 그런데 31일부터 1월 2일 저녁까지 사흘 동안 남자들이 술에 절어 있으니 '설날'이 아니라 '술날'이다.

마지막 날 저녁 평양시를 거닐면 아파트 창문에서 남자들의 합창 소리가 새 나온다. 술 마시고 망년회 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다. 젊은이들은 이날 저녁 인민대학습당에 걸려 있는 시계 종소리를 들으려 김일성광장으로 모인다. 10여 년 전부터 새해 종소리가 울리면 다들 만세를 부르고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면서 새해 인사를 하는 풍경이 생겼다.



새해 아침 애들한테는 할아버지·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게 한 뒤 신년 달력을 쥐여주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에게 찾아가 인사드리게 했다. 살림이 좀 넉넉한 집 어르신들은 인사하러온 동네 애들에게 사탕이나 사먹으라고 용돈을 주신다. 아파트 승강기에서 누굴 만나도 인사하기 어색했던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일 것이다.

새해 만둣국과 떡을 먹은 뒤엔 애들을 데리고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새해 참배'를 하러 갔다. 1월 3일 출근하면 명절 기간 무엇을 했느냐를 당 조직에서 확인하는데 동상 참배가 첫 번째 확인 조항이다. 참배가 끝나면 처가에 찾아가 장인·장모님께 인 사드리고 점심 식사를 했다. 2일은 휴일이지만 오전에 직장에 나가 간부들과 동료들의 방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주고받는다. 새해를 즐길 여유도 없이 이틀이 후딱 지나간다.

한국에서 설은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라지만 북한에서는 직장 동료와도 보내야 한다. 퇴근 후 회사에서 연락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한국에서 명절에 직장 동료와 시간을 보내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28/201812280129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