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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남에서는 삼식이, 북에서는 낮전등 남자들의 초라한 신세는 닮은꼴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8.31 03:00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요즘 방탄소년단(BTS)이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인기 원인을 들어보니 전통적인 남성의 성 역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BTS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북한에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몰래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 같다. 당시 주인공 송중기는 강인한 군인의 모습과 부드러운 '꽃미남'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줬다. 부드러운 꽃미남 군인이라는 설정이 생소했지만 드라마 자체는 좋아했다.

얼마 전 한 간담회에서 한국 대학생들과 북한 인권 문제를 얘기하는데 한 학생이 북한 대학생의 '젠더' 인식을 물어왔다. 북한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바깥세계를 이해하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젠더 개념은 좀 낯설었다. 지식이 없다 보니 엉뚱하게 "대부분 북한 대학생들이 대학 기간 성생활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동문서답했다는 걸 눈치챘다.



간담회 후 젠더라는 단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젠더와 섹스는 우리말로는 같이 '성'으로 번역되지만 젠더는 사회적인 의미의 성이고, 섹스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성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북한의 젠더 프레임은 6·25 때 사고에 머물러 있다. 전쟁 때 남자는 전선을, 여성은 후방을 지키는 것으로 성 역할을 분담했던 구조가 아직 남아 있다. 즉 남자는 사회에 나가 자기 존재를 빛내야 하고, 여자는 집에서 자식을 나라의 역군으로 키우고 남편을 잘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한국에 와서 젊은 아빠들이 아기 띠를 하고 다니는 모습이 영 낯설었다. 북한에서 그렇게 다녔다간 "남자가 얼마나 부실했으면…"하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한국에 온 탈북민 3만여명 중 여성 비율이 훨씬 높다. 탈북 남성보다 여성이 북한의 전통적인 젠더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보려는 도전 정신이 강하다. 탈북 여성을 만나본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활력 강하고 고집 센 여성들이 북한에서 어떻게 순종적인 삶을 견뎠을까 의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공산국가들은 하나같이 남녀평등을 요란하게 주장하지만 들여다보면 철저한 가부장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100여년 역사를 지닌 공산 체제에서 한 번도 여성 국가 지도자가 배출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공산 체제의 복종식 구조 때문이다. 북한은 전통적인 공산 체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버지의 결심에 따라 아들 중 한 명이 최고 영도자의 지위에 임명되면 그 사람이 국가와 사회의 '아버지'가 되는 구조다. 최고 영도자를 '우리의 아버지'로, 노동당은 '어머니'로 부른다. 나머지 사람은 지도자를 아버지처럼 받들어야 하는 '미성년'에 해당한다. 남성이 절대적인 지배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가부장적 구조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아버지(영도자)'가 가정의 생계를 돌보지 못하는 구조가 됐기 때문이다. 자연히 남성의 권위가 약해지고 여성이 위기 극복의 주체로 변하고 있다. 예컨대 북한 당국에서 장마당을 폐쇄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북한 여성들은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자본주의를 한다'는 논리로 맞섰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뚜기장(단속이 뜨면 메뚜기처럼 짐 싸서 옮기는 장)'이 '진드기장(단속이 나와도 진드기처럼 버티는 장)'으로 진화했고, 이후 당국이 공식 승인하는 '장마당' 구조가 뿌리 내렸다. 남편 월급이 가계에 아무 도움을 못 주니 남편을 일컬어 "밥 시간 되면 먹이만 찾는 멍멍이" "집에 없어도 되는 낮 전등(낮에는 밝으니 필요 없는 전등처럼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정도다. 한국에서는 은퇴하고 집에서 세 끼 꼬박꼬박 먹는 남편을 '삼식이'라고 한다 는데 비슷한 신세다.

최근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북한 외무성 1부상 최선희, 모란봉악단 단장 현송월 등 여성들이 북한 사회 전면에 등장하면서 '포스트 김정은 시대'를 대비해 김여정 체제를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만일 김여정 체제가 들어선다면 세습을 통해 첫 여성 국가 지도자가 공산권에 등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30/201908300189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