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입력 2022.02.25 03:00
줄 서라면 서고, 가게 닫으라면 닫고, QR 찍으라면 찍고
착하게 말 잘들었는데 2년간 결과는 나아진 게 없어
정부 “이젠 각자 치료하라” 선거 앞두고 영업시간 연장
한국 코로나는 시간 정해 활동하고 선거철엔 얌전해지나
시키는대로 다 하니까 우리가 정말 착한 줄로만 안다
평소엔 순해도 결정적 순간엔 사자 같은 힘을 낸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다. 줄 서라면 줄 서고, 주사 맞으라면 맞고, 가게 문 닫으라면 생계가 막막해도 닫았다. 코로나가 지배한 지난 2년여 우리 국민은 마치 순한 양 같았다. 52개의 암호화된 코드가 실린 것으로 의심받는 QR코드도 겁 없이 가는 곳마다 찍었고, 자가 격리자는 휴대폰에 앱을 깔아 일거수일투족을 국가에 보고했다. 중국식 방역이 시작된 홍콩에서는 생체정보가 중국 본토로 흘러간다며 저항하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백신 안 맞을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도 한다는데, 우리는 정부 말을 너무 잘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 너무 착한 거 같지 않아?” 코로나 시국에 한번쯤은 했거나 들었음 직한 말이다.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결과는 썩 나아진 게 없다. 국민의 80%가 백신을 맞았다고 하는데 코로나 확진자가 17만명을 헤아리고, 개학을 앞둔 아이를 둔 학부모는 불안에 발을 동동 구른다. 강력한 방역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공포는 다시 국민의 몫으로 돌아왔다. 확진자 증가 추세가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정부는 마치 선심 쓰듯 방역을 완화한다고 한다. 이 와중에 여당 대통령 후보는 당선되면 과잉 방역부터 뜯어고치겠다고 한다. 그동안 정부가 과잉 방역했는데 어리석은 국민이 순순히 따랐다는 뜻인가?
국민이 착하면 정부도 착해야 할 것 같지만 실은 그 정반대다. 국민이 착하면 정부는 더 나빠진다.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가 남긴 말처럼 “양의 나라는 늑대의 정부를 낳는다(A nation of sheep will beget a government of wolves)”.
K방역은 검사(test), 추적(trace), 치료(treat)로 구성된 소위 3T 전략으로 코로나 초기 꽤 성공한 것으로 칭송받았지만, 사실은 정부가 잘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피, 땀,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한국의 지하철에서는 아무도 감염되지 않으며, 한국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저녁 9시 이후에 활동한다는 식의 앞뒤 안 맞는 규제 기준이 있었지만 국민은 정부 통제에 동의하며 각종 모임에서 머릿수를 세고 시간을 준수하며 지냈다. 오미크론 확산으로 그 많은 감염자를 일일이 추적하거나, 격리·감시하기 어려워지자, 정부는 각자 집에서 치료하라며 방향을 바꿨다. 갑자기 풀어진 정책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오롯이 국민 몫이 되었다.
얼마 전 정부가 다시 자영업자 영업시간을 3주간 한 시간 늘려 10시까지 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결혼식 49명, 사적 모임 6명 같은 숫자를 철석같이 준수하다 갑자기 ‘셀프 치료’로 돌아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쯤에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한 시간이고, 왜 3주인가. 한국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야밤에만 활동하듯, 선거철에 특별히 얌전해지나 보다.
사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정권교체를 원하는 상황에서 유권자가 야권 후보 단일화를 바라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 통합 같은 거창한 명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내 표가 왜곡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후보들 사이에 득표차가 줄어들 경우 조작과 부정이 작동할 여지가 있으니 그런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고 싶은 것이다. 그 기저에는 불행하게도 선거제도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코로나 와중에 치러진 지난 제21대 총선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총선 당시 전국 17개 지역구에서 1번 후보가 63% 2번 후보가 36%라는 같은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왔는데, 통계학자에 따르면 동전 1000개 던져 모두가 같은 면이 나올 확률보다 낮다고 한다. 정기애 전 국가기록원 기록정책부장은 지난달 펴낸 ‘광기의 시대:비굴의 시간을 위한 기록’에서 부정선거 여부를 기록 측면에서 자세히 분석했다. “요즘 세상에 부정선거가 가능하냐?” “수백명의 눈을 속이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 라는 물음에 그는 “요즘 세상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디지털 세상이기에 수백명이 아니라 수십만명의 눈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답한다. 저자에 따르면 가장 투명하고 무결해야 할 선거 시스템이 문제가 있고, 그 시스템으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
지금의 확진자 추세라면 3월 9일 선거일 몇 명이 감염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 경우 격리 대상이 늘어나고 그 주변인까지 포함하면 투표율이 내려갈지도 모른다. 확진자와 격리자를 위해 별도의 투표 시간을 마련했지만 고령층의 경우 투표를 꺼릴 확률도 적지 않다. 사전투표는 조작 가능성이 있으므로 당일 투표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공공연하게 돌고 있고, 일부 열혈 주장자들은 자비로 광고를 내기도 한다. 문제는 부정선거가 있었느냐 여부가 아니라, 선거제도에 대한 불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거 당국은 이 불신을 해소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지난 총선 결과 선거무효소송이 제기된 곳 중 재검표는 3곳에서만 이루어졌고, 대법원은 재판을 미루고 있다.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은 있으나 아무도 해명해주지 않으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시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민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선거에서 미심쩍은 의혹들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하지 않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려 보자면, 하라는 대로 하니까 정말 착한 줄 안다. 우리 국민은 순한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자처럼 힘을 발휘한 적이 적지 않다. 코로나가 외출을 막아도 똑똑한 국민은 투표장에 갈 것이다. 야권 후보들도 이런 국민의 열망에 부응해야 한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2/25/BGN4DSX2O5CEXLGFNZ4ZJD45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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