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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자작나무 숲] 우크라이나의 검은 튤립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2.03.31 03:00

일러스트=이철원

30년 전 아프간 침공 때 젊은 병사 실어나른 러 수송기 ‘검은 튤립’
갈 때는 살아있는 병사 보냈지만 올 때는 1만5000명 전사자 실어
푸틴이 주장한 러와 우크라의 단일성, 침공한 순간 허상임을 증명

러시아 가수 알렉산드르 로젠바움 노래 중에 ‘검은 튤립’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죽은 젊은 병사들을 애도하는 곡으로, 이 곡이 나오면 청중은 일제히 기립한다. ‘검은 튤립에 올라타/ 보드카 한잔 따라 붓고, 말없이 대지 위를 난다/ 슬픔에 젖은 새 한 마리, 국경 넘어/ 러시아의 마른 번갯불 향해 형제들을 품고 간다….’ 검은 튤립은 소련이 사용한 군용 수송기 별칭이다. 아프가니스탄에 갈 때는 살아 있는 병사들을, 소련에 돌아올 때는 죽은 병사들의 관을 날랐다. 10년 동안 검은 튤립이 실어 나른 전사자가 1만5000명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한 달째인 3월 중순 기준으로 러시아군 전사자가 7000명(우크라이나 쪽 주장은 1만4000명), 우크라이나 군인·민간인 사망자는 2200명으로 추산된다. 오늘날 상황이 30년 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겹쳐지는 이유는, 두 경우 모두 궁극적으로 미(서방)-소(러시아) 냉전 체제의 대립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친소 공산 정권과 친미 반군의 충돌이었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친미(반러) 정권과 친러 반군의 내전 끝에 발발했다. 무력으로 국경을 넘은 쪽은 소련-러시아건만, 정작 그들은 ‘군사 개입 원조’(아프가니스탄) 또는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침공 사실을 부인한다. 아프가니스탄 때는 미국과 유엔이 소련에 대한 각종 경제·정치 보복 조치를 했으며, 이번에도 미국과 서유럽 국가가 중심이 되어 러시아에 초강경 경제 제재를 가한 상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종종 소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으로 손꼽혀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안팎으로 뚜렷한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공통점은 거기까지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번 문제의 핵심은 국제 관계와 지정학에 뒤얽힌, 아니 그 지형의 심장부를 꽉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는 역사·문화적 뿌리 의식에 있다. 객관적으로 정확한 판단이나 주장을 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신제국주의와 비민주성의 혐의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민족 해방’을 부르짖으며 형제 나라에 진군하고, 또 적지 않은 국민이 ‘조국’과 ‘어머니-러시아’의 이름으로 응집할 수 있는 것은 ‘한 민족, 한 역사’라는 국가 신념(조작이건 사실이건)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푸틴의 러시아를 나치로 규탄한다. 한편 러시아는 반대편을 네오-나치로 지목해왔다. 그것을 푸틴의 오래된 획책으로 보는 것이 미국 쪽 입장이고, 푸틴은 역으로 미국의 위선적 제국주의 야심에 공격을 퍼붓는다. 푸틴은 ‘푸틀러(푸틴+히틀러)’가, 워싱턴은 ‘파싱턴(파시스트+워싱턴)’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21세기 냉전 선포나 다름없다. 그것이 관 주도 민족주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9세기 말에 제창된 키릴 문자(러시아 알파벳), 10세기 말 도입된 기독교(정교), 중세기 240년간의 몽고-타타르족 지배를 공유한 슬라브 문화 공동체다. 키이우(키예프) 드니프로(드네프르)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키예프 공국(루스)’은 러시아 역사의 뿌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19세기의 우크라이나 출신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은 ‘내 영혼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중 어디에 속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카자크인의 용맹을 찬미한 소설 ‘타라스 불바’에서도 고골은 ‘옛 슬라브인의 영혼’ ‘우리 러시아 땅’, 이교도 외적에게 굴하지 않는 ‘러시아의 힘차고 광대한 국민성’을 줄곧 강조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개별성은 오직 하나로 합쳐 인류의 완벽함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보았다. 이것이 러시아 제국 시대의 낭만적 민족주의다. 푸틴의 러시아가 포기하지 않는 역사적 정체성의 본질이기도 하다.

무엇이 민족과 민족 사이를 획정하는가? 언어, 종교, 혈통, 역사, 이념의 동시성인가? 정치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 개념으로서 ‘민족(nation)’을 가리켜 ‘상상의 공동체’라 이름 붙였다. ‘민족’은 제국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조립되고 이전될 수 있는 정치 공동체’라는 말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양방 간의 동족 살인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는 멀고 먼 과거 역사나 피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자기방어적 공격성의 벽(민족주의)을 구축한다. 푸틴이 주장해온 명분, 곧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단일성’은 침공하는 순간 허상으로 증명되었다. 푸틴은, 자신의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우크라이나 분리주의를 승인해준 꼴이 되었다. 푸틴이 둔 패착이다. 그러나 동시에 푸틴 혼자만의 책임으로는 볼 수 없는, 정치 권력이란 괴물의 광폭한 소용돌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3/31/M5E5HQI2PVBTDIEKJQIG3K33X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