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입력 2022.09.06 03:00
한산도 승리 5년 뒤인 1597년 7월, 1만여명 조선 수군 괴멸
조정의 압박 못 견딘 원균 ‘유리할 때 공격하라’는 원칙 무시
이순신은 기회 기다리면서 싫은 사람과도 손잡는 리더십 보여
‘이 섬에서 한 달쯤 살고 싶다.’
지난달 거제도 북쪽 섬 칠천도에 답사 여행을 갔을 때 든 생각이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연륙교를 통해 들어간 칠천도는 ‘아름다운 정적(靜寂)’ 그 자체였다. 이 작고 아름다운 섬에서 425년 전 1만여 조선 수군이 괴멸되었다. “조선 수군 최대 치욕”으로 간주되는 칠천량해전은 한산도대첩보다 정확히 5년 뒤인 1597년 음력 7월에 벌어졌다.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을 보면,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조정의 강압을 못 이겨 7월 15일 부산 앞바다로 나아갔다. 흩어지는 일본 군선을 쫓던 조선 수군은 부산 앞바다의 물마루(물이 높이 솟은 고비)를 넘어 대마도가 바라다보이는 외해(外海)까지 떠밀려갔다. 회선(回船) 명령이 떨어졌으나 “배들이 역류를 넘느라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어, 7척은 동해로 표류하여 떠내려갔다.”
죽을힘을 다해 겨우 배를 돌린 조선 수군은 적선 500여 척의 추격을 받으며 오후 무렵에야 가까스로 거제도 북단에 도착했다. 땔나무와 물을 구하러 올라간 아군 400여 명이 매복한 적의 기습을 받았다. 밤 10시경 부랴부랴 칠천도로 후퇴한 조선 수군은 “셀 수 없이 많은” 적선에 포위당했다. 원균은 여러 장수에게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다만 순국(殉國)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팔을 걷어붙이며 큰소리로 ‘적의 칼날이 박두해 있고 우리 세력은 외롭고 미약한 상태’이니 싸워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하지만 원균은 “죽으면 그만”이라며 거부했다.
다음 날인 7월 16일 새벽에 조선 수군이 당한 참담한 패배는 알려진 대로다. 아군 160척이 적군 500여 척과 싸워 150여 척이 적군에게 격침 또는 나포되었고, 원균과 이억기 등 조선 수군 지휘부 대다수가 장졸들과 함께 사망했다. 칠천량해전의 적장은 한산도대첩에서 패전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였다. 그는 조선 수군을 사면에서 에워싸면서 조총으로 공격했다. 여러 척의 일본 군선이 조선 배를 포위한 가운데 군선의 돛대를 사다리 삼아 올라와 백병전을 벌였다. 이순신이 가장 경계했던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 앞에 조선 수군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답사 이틀째 통영을 거쳐 한산도에 들어갔다. 이순신의 집무실이자 작전회의 장소였던 한산도 운주당(運籌堂)에 올라갔다. 지금은 제승당(制勝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에 걸터앉아 가지고 간 ‘제승방략(制勝方略)’을 펼쳤다. 세종 때 북방의 전략전술을 담은 이 책은 ‘김종서가 입으로 말하면 그 옆에서 신숙주가 날아갈듯이 빠르게 받아적었다’는 병서다. ‘군무(軍務)’와 ‘금령(禁令)’ 부분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칠천량해전은 ‘승리를[勝] 제압해 놓고[制]’ 이끌어 간 한산도대첩과 정반대로 진행된 전투였다.
대표적으로 청야입성(淸野入城), 즉 적군이 우세할 때는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 지키다가, 상황이 유리해지면 공격하라는 ‘군무’ 제24조를 원균은 무시했다. 그는 부산 앞바다 전투 환경에 무지한 국왕 선조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순천향대 제장명 교수는 ‘이순신 백의종군’에서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작전 지휘권의 균열에서 찾았다. 실제로 전시 행정을 지휘하는 도체찰사 이원익과, 전쟁 총괄 도원수 권율, 수군 총사령관인 통제사 원균 사이에 불협화음이 컸다. 6진 대군분(수비 전략)과 3고을 분군(공격 전략)이라는 진법(陣法)을 적군에 맞게 운용하되, 총사령관에게 지휘권을 통일시키라는 ‘제승방략’의 ‘군무’ 제4조와 크게 배치되는 상황이었다.
5년 전 한산도대첩 때는 달랐다. 이순신은 적의 움직임을 파악한 다음, 비교적 안전한 통영 서쪽의 당포에 조선 함대를 집결시켰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이 인근 섬에 매복한 가운데, 통영 동쪽 견내량에 있던 일본 군선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냈다. 적선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이순신은 판옥선의 뱃머리를 돌렸다. 이순신 함대가 중앙에 머물러서자, 양쪽 날개 쪽의 배들도 각기 방향을 틀어 왜적을 포위했다. 학익진(鶴翼陣)이라는 ‘바다 위의 성(城)’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전라도 좌수영(이순신)과 우수영(이억기), 그리고 경상우수영(원균)의 배로 구성된 연합함대의 집중 포격이 있었다. 기세가 꺾인 채 달아나는 왜적을 조선 수군은 안골포(진해)에서 총공격하여 절반 이상의 적선을 파괴했다. ‘군무’ 제24조의 성공적인 적용을 보는 듯했다.
두 전투를 다르게 만든 것은 군사나 전함 수, 거북선이 아니었다.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고도의 자기 통제력과, 싫은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어 끝내 승리를 제압해 내는 리더십의 차이가 천양지차(天壤之差)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9/06/LZSTBZDVH5GIXO3M6BA7MSGE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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