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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2030 플라자] 눈먼 돈 당연시하는 나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입력 2022.11.17 03:00

/일러스트=이철원

예산 집행률 높이는 데만 관심 두니
‘보도블록 교체’ 같은 낭비 반복
중요한 건 ‘예산 빨리 쓰기’보다
‘필요한 곳에 잘 쓰기’임을 유념해야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적폐 제도인 신속집행 폐지를 간절히 청원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전년도에 계획한 예산 규모대로 지출하는 것만 강조된 결과 부실 공사 등이 발생하고 행정력도 낭비된다는 내용이었다. 예산을 어떻게 빨리 사용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국민에게 필요한 예산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질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공무원과 국민이 공감해 1만명 이상이 청원에 동참했음에도 청와대,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그 어디도 개선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당시 제기된 국가 재정 운영의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예산을 편성하는 것만 강조된다.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국가 돈을 쓸지에는 사회적 관심이 크게 없어 보인다. 예산 편성 및 집행에 가시적인 문제가 없는 한, 언론이나 국회의 관심은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했나’보다 ‘편성된 예산을 왜 쓰지 않았나’에 있다. 그러다 보니 상급 기관은 매달 편성된 예산에 대해 지출 계획을 세워서 하급 기관에 그대로 수행할 것을 지시하고, 그 지출 실적 관리에 급급하다. 더 적게 쓰도록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쓰는 방향으로 추궁한다. 돈을 아껴 예산을 남기고 있는 기관이 있으면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왜 쓰지도 않을 돈을 요구했나’라며 해당 기관의 장을 질책한다. 사업 필요성이 일시적으로 줄었다고 보고하면 ‘올해 돈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필요 없는 예산이었다는 것’이라며 ‘집행 실적이 낮으면 내년 예산 감축이 불가피하다’면서 불필요한 예산 지출을 강요한다.

그동안 정부는 매년 상반기가 끝나면 집행 실적이 60%에 근접했다고, 연말이 되면 편성된 예산 대부분을 집행했다는 것을 성과인 양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세금 낭비가 반복되었다. 매년 반복되는 보도블록 교체가 그 대표적 사례다. 사업 목적에 맞게 집행할 곳이 더는 없다는 지방정부나 공공기관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알아서 지출하라면서 돈을 떠넘겼다. 집행 실적을 높일 목적으로 말이다. 2018년 당시의 국민청원은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재정 운영 방식에 따른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었다.

예산이 편성되는 시점과 집행되는 시점 사이에는 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재정 당국과 국회의 심의와 의결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그 시차는 짧게는 수개월이고 길게는 1년도 넘는다. 오늘날과 같이 행정 환경이 복잡해진 상황에서 1년 뒤에 필요한 자금 규모를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세금을 쓰는 방식은 1년 뒤에 사용할 용처를 정해둔 후, 그 용처에서 벗어나면 잘못한 것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영어 자격증 취득을 목적으로 1년간 학원 등록을 계획했다고 가정해 보자. 1년이 지나지 않더라도 영어 자격증을 땄다면 굳이 학원을 다닐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학원을 계속해서 다닐 것을 요구한다. 학원을 다니지 않겠다고 하면 ‘편성된 예산을 임의로 집행하지 않는다’고 질책한다.

비상식적인 재정 집행은 이뿐이 아니다. 더 적은 비용으로 사업 수행이 가능한데도 편성된 예산이 남을까 우려해 기존 재정 지출 방식을 되풀이한다. 예산을 절감한 공무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예산 성과금 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상적 사업에서는 ‘집행률을 높이라’는 지시로 예산 절감보다는 편성된 예산을 모두 지출하는 것이 더 강조된다. 국가 돈은 눈먼 돈이 되어 몇몇 사람들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돈을 타낸다. 이런 일이 누적되면서 국민은 국가를 불신하게 된다. 다행히 이번 정부는 집행률 관리 실적을 보도자료 돌리며 발표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집행률 관리보다 세금이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사용될 방법을 고민했으면 한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11/17/2KYSSHYWZNCDZOXLDEGRWJEY6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