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논설위원
입력 2023.10.27. 20:41 업데이트 2023.10.28. 00:04
지난 늦여름 중국에서 현직 총리 리창보다 더 화제가 된 인물은 리커창 전 총리였다. 그가 8월 말 간쑤성 둔황을 방문한 모습이 X(옛 트위터)에 올라왔다. 퇴임 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나온 그를 많은 관광객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중국 경제가 날로 악화하는 상황에서 경제와 민생을 우선시한 그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준 것이었다. 중국이 통제하는 SNS에서는 더 이상 이 영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퇴임하면서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며 시진핑 주석을 견제한 듯한 영상도 삭제됐다.
▶공산주의 청년단 수장 출신의 리커창이 2013년 총리를 맡을 때만 해도 실세 총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시진핑과 투 톱 체제를 뜻하는 ‘시리쭈허(習李組合)’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진핑이 그를 견제하면서 활동이 갈수록 위축돼갔다. 시진핑이 집권 2기 들어 본격적으로 경제 정책까지 독점하자 그는 “튀지 않고 앞서가지 않는다”는 2인자의 철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1인자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에서 2인자가 살아남기 위해선 고도의 처세술을 요구한다. 권력욕과 의심이 많은 마오쩌둥 주석 옆에서 30년 가까이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는 늘 마오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신임을 얻었다. 장쩌민 주석 시절 말기인 2002년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 부주석은 중국 언론에 그의 방미 동정이 처리되지 않거나 단신 기사로 처리되도록 했다. 이토록 조심스레 주석의 심기를 살핀 덕에 1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진핑 1인 독재 체제가 본격화된 후, 중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친강 외교부장과 리샹푸 국방부장은 갑자기 사라진 후 해임됐다. 리커창을 육성한 후진타오 전 주석은 당 대회에서 시진핑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끌려나갔다. 최근 반(反)간첩법을 강화하면서 과거 죽(竹)의 장막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비판이 많이 나온다.
▶중국 관영 매체가 리커창이 27일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중국 내부 상황이 심상찮다 보니 그의 부고(訃告)가 느닷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국내 네티즌들은 근거 없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웅성거렸다. 일부 중국 전문가들은 그가 2인자 생활을 오래하면서 화병이나 우울증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실리와 민생을 중시하는 그가 2인자 대신 당 총서기가 됐다면 미·중 갈등이 약화되거나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명복을 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10/27/WK4FDUCQIZGCJH56DNH3TKU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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