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3.11.30. 03:00 업데이트 2023.11.30. 05:32
메두사의 목을 베고 마셨던 페르세우스의 祝杯처럼
LG 트윈스의 ‘오피셜 축승주’에는 古典의 느낌이…
세상에는 어른을 위한 감미로운 동화도 필요하다
몇 년 전에 ‘야구단의 아와모리’를 소재로 신문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느 야구단의 구단주가 오키나와로 전지 훈련을 갔다가 우승하면 따려고 아와모리를 사두었는데 27년째 열리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신문의 편집자는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27년째 봉인 중인 그 술 언제 맛볼 수 있을까?” 야구단이 오키나와에 갔던 해는 1994년, 야구단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해였다. 우승한 해에 연달아 다음 해까지 석권하겠다는 구단주의 의지이자 동기 부여가 아와모리였다.
야구보다는 술에 관심이 있는 내가 이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역시 술 때문이었다. 오키나와에 다녀오신 분께 받은 아와모리를 마시다가 이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딸려 올라왔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썼다. “아와모리를 (…) 10년 넘게 따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유는 우승주이기 때문이다. 우승을 해야 마실 수 있는 술이라는 말, 우승을 하지 못한다면 우승주도 없는 것이다.” 내가 따지 못하는 아와모리에 대해 들은 게 최소한 15년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와모리를 먹다가 야구단의 아와모리와 야구단의 우승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아와모리의 맛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었다. “화이트 와인의 색과 비슷하지만 좀 더 짙다. 오크 숙성을 한 화이트 와인 같달까. 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색을 보다가 마셨다. 뭐랄까. 강한데, 맑았다. 일본 소주의 청량함, 중국 백주의 농후함, 거기에 싱글 몰트 위스키의 정제된 부드러움, 이 모든 게 느껴졌다.” 평범한 아와모리도 이런데 야구단의 아와모리는 대체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위에서 말한 야구단이란 LG 트윈스다. 올해 LG 트윈스는 우승했다. 29년 만의 우승이었다. 매해 스포츠 기사에서 올해는 과연 열릴 수 있을까라며 소소하게 관심을 끌던 아와모리도 29년 만에 열렸다. 아와모리가 개봉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그걸 축승식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단주가 아와모리 항아리를 잡고 야구단 단장이 술 국자로 아와모리를 펐다. 아와모리를 샀던 구단주는 아니었다. 구단주가 죽고 기업을 물려받은 구단주의 아들이 구단주가 되어 아와모리가 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계속 찾아봐도 이날 열린 아와모리의 맛에 대한 글은 찾을 수 없었다. ‘야구단의 오피셜 축승주’라고 해야 할 그 술에 대해 왜 아무도 맛을, 향기를, 또 감흥을 표현하지 않는 건가 싶어 의아했다. 그것은 축배였기 때문이다. 페르세우스 같은 영웅이 메두사의 목을 베거나 알렉산드로스가 말할 수 없이 잔혹하고 웅장한 교전에서 승리하고 마셨던 것에 비할 수 있을 정도의 축배. 대단한 승리를 거둬야 마실 수 있는 게 축배이고, 그런 승리란 현대 세계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인데 이번 LG 트윈스의 우승에는 고전적 세계의 승리라는 느낌이 있다.
그러다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축배를 들어라. 오늘을 위해서 내일을 향해서 축배를 들어라”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LG 트윈스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 이 노래가 나오는 걸 들으며 야구단의 공식 응원가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로 제목이 ‘축배’다. LG 트윈스 팬이기도 했던 그는 다른 LG 트윈스 팬들처럼 우승을 바라며 이 노래를 만들었을 텐데 2010년에 죽었고, 2023년에 LG 트윈스가 우승하는 순간 이 노래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유튜브에 노래를 들으러 갔다가 이 댓글들을 읽게 되었다. 당연히 LG의 우승을 기뻐하는 댓글이 있었고 “LG 우승했네요. 그곳에서도 보셨겠지요”라며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에게 말을 건네는 댓글도 있었다. 케이티, 롯데, 키움, 한화, 삼성, 기아, 엔씨, 두산 등 응원하는 팀의 내년 승리를 기원하는 댓글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롯데, 맨날 욕하지만 사실 너네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라는 글처럼 그들은 응원하는 팀이 잘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싶으니까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의 승리를 기원하며 또 한 해를 보낼 힘을 얻는다는 것을 느꼈다.
LG 트윈스 팬들의 기쁨이 컸던 것은 장장 28년이나 계속되었던 실패와 좌절, 그리고 원망과 한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군가는 아버지를 잃었고, 누군가는 또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신화나 전설 말고도 가끔 이렇게 어른들을 위한 감미로운 동화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아와모리가 없었다면 그 동화는 좀 밋밋했을 것이다.
아와모리 | 페르세우스 | 메두사 | 알렉산드로스 | |
축배를 들어라 |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11/30/WQXQ4YBUXBCCRM6ALSD2VJUZRM/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선 겹치지 말자” 美돌싱들 이혼하고도 동거하는 까닭 (1) | 2023.11.30 |
---|---|
고령자들 은행 믿고 ‘네, 네’ 하며 가입했는데… 8조 ELS 반토막 (0) | 2023.11.30 |
♥[만물상]‘역사상가장똑똑한사진’ (1) | 2023.11.30 |
“AI의 거짓말 막아라” 글로벌 테크들 신기술 속속 선보여 (0) | 2023.11.29 |
♥[자작나무 숲] 바람 쌩생, 외투의 계절이다 (1) | 2023.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