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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이슬람 금주 족쇄’ 푼 사우디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4.01.25. 21:06 업데이트 2024.01.26. 01:42

일러스트=이철원


이슬람 국가 대부분이 율법으로 술을 금지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그중에도 엄격해서 술을 마약과 함께 중범죄로 다룬다. 중동 국가가 모두 사우디 같은 것은 아니다. 두바이는 호텔에서의 음주를 허용하고, 요르단은 ‘아락’이라는 도수 높은 증류주를 공항 면세점에서 판다. 금주 규정이 들쑥날쑥한 것은 이슬람 경전인 코란 자체가 애매해 저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이여 술과 도박과 우상 숭배를 피하라’면서 한편으론 ‘취하는 것이 인간에게 좋은 점도 있지만’처럼 장점을 거론한다.

▶기독교도 술을 금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결혼식에 참석한 예수가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 나온다. 다만 당시 포도주 도수는 4~5도여서 사실상 물에 가까웠다고 한다. 수질이 나쁜 중동에선 고대부터 ‘포스카’라는 신포도주로 물을 소독해 마셨다는 것이다. 술에 대한 입장도 코란만큼 애매해 잠언에선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가 시편에선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음주에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한국만의 특징이다.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개화기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의 무절제한 음주 행태와 그로 인한 폐해를 접한 뒤 음주를 노름·축첩과 함께 악습으로 규정한 것이 이후 전통으로 굳어졌다. 불교 역시 신도가 지켜야 할 도리를 규정한 오계(五戒)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돼 있지만 정작 석가모니는 음주는 물론 육식도 완전히 금하지 않고 조건부로 허용했다.

▶사우디가 1952년 술의 제조·판매·음용을 모두 금지한 지 72년 만에 주류 매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비(非)이슬람 외교관만 대상으로 한다지만 큰 변화다. 사우디의 주류 매장 허용은 실권자인 빈 살만 왕세자의 결단이다. 국가 개조 청사진인 ‘비전 2030′ 아래 홍해 자유관광지구 조성, 네옴시티 건설, 여성 운전과 공연장의 남녀 동석 허용 등 잇단 개혁 조치를 추진해 온 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우디의 금주법 도입은 왕자 중 한 명이 만취해 영국 외교관을 사살한 것이 계기였다. 적절히 술을 절제했다면 없었을 사고였다. 주요 종교가 완전한 금주보다 절제를 요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사우디는 너무 극단적으로 막는 바람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왕실 귀족조차 술을 마시고 싶으면 비행기를 탔고, 처벌 위험을 무릅쓴 술 선물이 신뢰의 증표로도 쓰이는 부작용이 빚어졌다. ‘지키지 않을 법’의 위선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도 문명의 척도일 것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4/01/25/Z5RPSPNNKVAD3LDRUDMOQCG74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