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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여사 리스크’가 아니라 공천 문제가 핵심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
입력 2024.01.26. 03:00 업데이트 2024.01.26. 06:12

용산의 일관된 목표는 ‘윤석열당’ 만들기
역대 모든 대통령이 똑같은 생각 가져
윤·한 충돌의 속 깊은 곳엔 공천 주도권
명품 백 문제 해소, 공천 물밑 조율이 타협책
파국이냐 타협이냐, 선택은 윤 대통령 몫

일러스트=이철원


윤석열 대통령이 정권 명운을 결정할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지난 일요일 국민의힘 이용 의원은 ‘윤 대통령, 한 비대위원장 줄 세우기 공천에 기대·지지 철회’라는 ‘쿠키 뉴스’ 기사를 의원 단톡방에 올렸다. 올린 사람도 올린 내용도 충격이었다.

기사에서 인용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한 비대위원장에게 보냈던 기대와 지지를 철회하고 비대위원장 거취 문제에 대해서는 당 결정에 맡기겠다고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이 모든 사태에 책임지는 처신을 보여주기 바란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사퇴를 종용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초현실적 상황이었다.

‘채널 A’와 SBS 후속 보도를 통해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사퇴를 종용한 인사가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임이 밝혀졌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눈사태가 되고 있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국민 보고 나선 길, 할 일을 하겠다”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대통령실은 “비대위원장 거취 문제는 용산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며 사퇴 요구 보도를 부인했지만 한 비대위원장은 “제가 사퇴 요구를 거절했다”며 이관섭 실장의 사퇴 요구를 공개적으로 확인해 줬다. “당은 당의 일을 하는 것이고, 정은 정의 일을 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라며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에 대해 경고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사태의 발단이 된 ‘김건희 여사 리스크’에 대한 질문에도 “제 입장은 처음부터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며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저는 선민후사(先民後私)하겠다”는 말로 윤심보다 민심을 따르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한 비대위원장이 공세적으로 나오자 확전에 부담을 느낀 대통령실이 서둘러 봉합했다. 예견된 결과였다. 한동훈 비대위원장 사퇴는 총선 패배를 의미하므로 애당초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 사태의 최대 패자는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①민심 ②여론 ③당 신뢰를 모두 잃었다. 정치 싸움의 승패는 명분·타이밍·세력이 결정하는데 지금은 모든 조건이 최악이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①누구와 싸우느냐 ②왜 싸우느냐 ③언제 싸우느냐 ④어디서 싸우느냐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중요한데 준비 없이 나섰다가 패배를 자초했다.

베트남 전쟁 영웅 보응우옌잡은 ‘3불 전략’으로 프랑스·미국과 싸워 이겼다. 전략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3불 전략’은 ①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말고(회피 전략) ②적이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지 말고(우회 전략) ③적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운다(혁파 전략)는 세 가지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실은 ①총선이 임박한 시점에 ②공천 이슈로 ③늘 하던 방법으로 비대위원장을 사퇴시키려고 했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

사태의 발단은 겉으로는 김경율 비대위원의 ‘김건희 리스크’ 발언이다. 김 위원은 지난 8일 “3·4선 의원도 알고 있고, 대통령실도 알고 있고, 전직 장관(한동훈 비대위원장)도 알고 있음에도 여섯 글자(김건희 리스크)를 지금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여당 지도부 인사로는 처음으로 ‘언터처블’ 이슈를 건드렸다. 한동훈 위원장도 “기본적으로는 ‘함정 몰카’이고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맞지만 전후 과정에서 분명히 아쉬운 점이 있고 국민들께서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다”고 호응했다.

역사학자 E·H. 카는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날카로운 통찰을 남겼는데, 여당의 본질적 갈등은 ‘김건희 리스크’가 아니라 ‘공천’이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2년도 안 됐는데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벌써 세 번째 비대위원장이다. 그 사이 전당대회에서 뽑힌 이준석·김기현 당 대표가 쫓겨났다. 누가 봐도 비정상이다. 이준석 대표를 쫓아내고, 전당대회에서 ‘김·장 연대’로 김기현 대표를 앉히고, 다시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앉힌 주류의 일관된 목표는 ‘윤석열당’이다.

모든 대통령이 (예외 없이) 똑같은 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그건만으로 뭐라 할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 목표에 집착할수록 목표에서 멀어졌다는 게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을 만들어준 이준석·안철수와의 ‘선거 연합’ 해체로 중도와 2030의 지지를 잃은 것은 자기가 앉은 의자 다리를 스스로 자른 격이지만, 권성동·장제원·김기현에 이어 한동훈 비대위원장마저 내치려고 한 것은 아예 팔다리를 자르려고 한 격이다.

정치 분석은 의도·의지·역량·실행·결과·파장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 이준석 대표를 내쫓을 때는 윤석열 대통령 의도대로 실행해서 원하는 결과는 얻었지만, (선거 연합 해체로) 지지율 급락이라는 파장으로 위기를 자초했다. 김기현 대표를 사퇴시키고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앉히는 과정에서는 (미래 권력의 조기 등판으로) ‘조기 레임덕’이라는 파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지금은 의도와 의지가 있더라도 실행할 힘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예상되는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①한동훈 위원장의 정치적 패배 ②한동훈 위원장의 정치적 승리 ③적당한 타협. ①은 한동훈 위원장이 사퇴하거나 김경율 비대위원이 사퇴하는 것인데 만약 그렇게 되면 총선 전망은 어두워질 것이다. ②는 명분·타이밍·세력에서 승기를 잡은 한동훈 위원장이 ‘한동훈당’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 경우 총선 전망은 조금 밝아지겠지만 신구 권력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③은 특수한 신뢰 관계로 알려진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위원장이 파국을 막기 위해 타협하는 것으로, ‘김건희 리스크’는 대통령실에서 부담을 덜어주고 공천은 물 밑에서 조율하는 것이다. 한동훈 위원장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총선 전망이 밝아지는 시나리오다. 현 시점에서 가능성은 ①20% ②40% ③40% 정도로 보인다. 선택은 윤석열 대통령 몫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01/26/VAA64CK7HZGGROREG57A2N4W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