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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유석재의 돌발史전] “요즘 젊은 것들은…” 아직도 이런 말 쓰세요?

유석재 기자
입력 2024.02.09. 00:00 업데이트 2024.02.09. 03:53

/일러스트=이철원


요즘 TV에서 ‘미스트롯3′와 ‘현역가왕’을 보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연령층이 함께 시청하는 게 가능한 프로그램이 트로트 오디션 말고 과연 또 뭐가 있을까?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것도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현역가왕’의 한 장면. 젊은 가수가 ‘그 잡채’라는 가사가 든 노래를 부르자 심사위원 중 연장자인 남진이 알아듣지 못하고, 40대인 이지혜가 ‘요즘엔 자체라는 말을 발음이 비슷한 잡채로 쓰는 경우가 있다’고 ‘통역’해 주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사실 지금 대한민국은 연령대에 따라 쓰는 언어 ‘잡채’가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은 웬만해선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지 않게 됩니다. 직업이나 취향과는 무관하게 남녀노소가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장소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식점이든 술집이든 공연장이든 PC방이든 클럽이든 노인정이든, 그곳은 입지조건에 따라 특정 연령층을 중심으로 고작 플러스마이너스 5~10년 정도의 스펙트럼만 허용하는 것 같아요.

사실 요즘 전(全) 연령층에 속한 인물들을 폭넓게 볼 수 있는 곳은 일일연속극이 아니면 대중교통 정도입니다. 그래서 버스와 지하철은 특히 흥미로운 곳이기도 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뻔히 교통약자석이나 임산부석이라고 써 놓은 자리에 조금도 망설이거나 심리적 회의(懷疑)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젊은이들을 보고 분노를 느낍니다. 젊은 사람들은, 입시공부와 입사준비와 수많은 면접들을 거쳐 파김치가 된 사람들은 특히, 오직 세상을 좀 더 살았다는 이유로 당당하게(때로는 뻔뻔하게) 앉아있는 자리를 요구하거나 빼앗다시피 가로채거나 50m 이상 전방에서 필사적으로 질주해 둔부(臀部)를 앞세워 슬라이딩 터치를 하거나 “여기 자리 났어~ 일루 앉으셔~”라는 말을 원격조종 리모컨의 용도로 사용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절망을 느낍니다.

혹은 연령과는 무관하게, 열차 안이 빨래터나 사랑방의 현대적 변용이라고 판단을 했는지 5인 이상이 목청 높여 담소를 나누거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도 이동통신의 힘을 빌려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전설에 등장하는 신라 말기의 이발사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했을만한 볼륨 수준의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찾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하철의 긴 의자를 유심히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만일 그렇게 오랫동안 지하철을 타 오신 분이시라면(서울의 경우 지하철 1호선 개통은 1974년) 한번쯤 이렇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을 법도 합니다. “긴 의자의 정원(定員)은 몇 명일까?” 정답은 일곱 명, 최근 나온 신형 전동차는 여섯 명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말이죠, 그 의자에 다섯 명, 심한 경우엔 네 명까지도 ‘꽉 찬 채로’ 앉아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분들은 전혀 씨름선수급의 사람들이 아니라 보통 체구인데도 말입니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거나 가방이나 핸드백을 좌우에 밀착시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가끔 비분강개(悲憤慷慨)를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떠는 듯한 어르신들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경우는 아닙니다. 때로는 불특정 다수에게 던지는 연설문의 형식을 띠기도 하고, 때로는 옆자리 친구분과의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승전결의 논리적 연결고리에서 많거나 적은 알코올 기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격문(檄文)을 방불케하는 준엄한 꾸짖음의 전문(前文)은 대개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게 마련입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말이야…!”

아! 그래요.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젊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런데 저 아이들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안되는데, 저러면 안되는데. 어른들의 계도(啓導)가 투명하게 실현되는 사회라면 아무런 걱정도 없을 것인데.

혹 이 부분에서 “수메르 점토판을 보면 까마득한 옛날에도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고…’ 뭐 이런 문장이 있다던데?”라는 생각을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답답한 노릇이죠. 그 1차 사료를 우리가 구해 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분명히’ 있는 동양고전이 있습니다. 최소한 기원전 235년 이전에 씌어진 책. 바로 ‘한비자(韓非子)’입니다. 이 책 오두(五蠹)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今有不才之子, 父母怒之弗爲改; 鄕人譙之弗爲動; 師長敎之弗爲變. 夫以 ‘父母之愛’ ‘鄕人之行’ ‘師長之智’ 三美加焉, 而終不動, 其脛毛不改.

(금유부재지자, 부모노지불위개; 향인초지불위동; 사장교지불위변. 부이 ‘부모지애’ ‘향인지행’ ‘사장지지’ 삼미가언, 이종부동, 기경모불개.)

요즘의 덜떨어진 젊은 녀석들은 부모가 화를 내도 고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욕해도 움직이지 않고,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을 모른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 ‘동네 사람들의 행실’ ‘스승의 지혜’라는 세 가지 도움이 더해져도 끝내 미동도 하지 않아, 그 정강이에 난 한 가닥 털조차도 바뀌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치 요즘 ‘교실 붕괴’ 현상에 좌절감을 느낀 교육전문가의 시론 중에서 옮긴 말 같군요.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1955년작 영화 ‘이유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에는 이런 대사가 나오죠. 제임스 딘이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건달들에게 왕따를 당할 위기에 놓이자 반발, 그들과 차를 몰고 절벽으로 돌진해서 늦게 뛰어내리기를 겨루는 ‘겁쟁이 경주’를 하게 됩니다. 경주를 앞두고, 건달 두목은 딘에게 “사실 말인데, 난 널 좋아해”라고 말합니다. 딘이 의아한 목소리로 “그런데 왜 이 짓을 하는 거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건달의 대답.

지금은 뭔가를 하긴 해야 하잖아(You got to do something now, don’t you?).

그렇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뭔가를 해야 합니다. 그들은 아직 도정(道程)에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 ‘뭔가’를 마음에 들어 하는 어른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바로 ‘버릇이 없기 때문에’ 유년(幼年)이고 청년(靑年)인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른들이 보기에 무명(無明)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어른들이 못마땅해 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젊은 것들은…’이란 관용구로 시작되는 불특정다수에 대한 꾸짖음은 그래서 기성세대의 도덕적 우월성을 상징하는 선제공격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너는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다”라는 말도 있죠.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자신이 거쳐온 곳들에 대해 말하기가 쉽고, 또 말하고 싶게 마련입니다. 그 정도가 심해 아예 예의염치(禮儀廉恥)를 파기해버린 듯한 지금에 있어서 그 분노의 강도는 더욱 클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言]의 화살이 최종적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곳 말입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범은 훈화(訓話)보다 유효하다(Example is more efficacious than precept).”

그렇다면 그 예전 전국시대, 청년들을 교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한비자식의 접근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과연 법가(法家)의 방식에는 물기나 여백이 없었습니다.

州郡之吏, 操官兵推公法, 而求索姦人, 然後恐懼, 變其節易其行矣. 故父母之愛, 不足以敎子, 必待州郡之嚴刑者. 民固驕於愛, 聽於威矣.

(주군지리, 조관병추공법, 이색구간인, 연후공구, 변기절역기행의. 고부모지애, 부족이교자, 필대주군지엄형자. 민고교어애, 청어위의.)

주군(州郡·지방정부)의 관리가 관병(官兵)을 통솔하고 공법을 시행해 범법자를 잡아들인 후에야 겁을 내 그 뜻을 바꾸고 행동을 고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부족하고, 반드시 주군의 엄한 형벌이 있기를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민(民)이란 원래 사랑에는 교만하고 권위에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이겠습니까? “사랑의 매가 필요하다!” “군대 가야 사람 된다!” 이런 걸까요? 아닙니다. 훨씬 더 심한 말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듣게 하려면 교육보다 법(法)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학력고사 시험장에 경찰을 출동시켜 커닝하는 학생들을 잡아내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개념하고 통하는 말일 것입니다.

자, 지금 일어나는 문제들을 한비자식으로 해결하려면 이렇게 하면 될 것입니다. 경로석에 앉은 젊은이에게는 과태료를 부과하고, 술마시고 소란을 피우는 학생들은 집시법 위반으로 긴급체포하고, 담배를 피우는 중고생들은 구류 조치하고, 급우에게 심한 말을 하는 아이들은 소년원으로 보내는 겁니다.

엄벌혹형(嚴罰酷刑)이란 이런 것입니다. 혹 이렇게 하고 싶어하는 어른들이 정말로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지하철 훈계’에 알콜기가 유난히 많다 싶은 경우엔 아닌게아니라 이와 비슷한 언어들이 잠깐씩 섬뜩한 어기(語氣)에 휩싸였다 사라지곤 합니다. 분홍색 선연한 임산부석과 그 옆자리에 걸쳐서 다리를 꼬고 앉아 그런 말을 하시는 분도 본 적 있습니다.

그런 식의 훈계가 ‘라떼’나 ‘꼰대질’로 여겨지며 공감을 받지 못하는 지금에 비해 몇십 년 전의 세상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우월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연장자라고 해서 초면인 이에게 갑(甲)의 자리에서 훈계하는 일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지닌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만약 이런 변화 자체도 ‘요즘 덜떨어진 젊은 것들의 못된 짓’이라고 여긴다면 더 이상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말이죠.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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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4/02/09/QQ3WKCM3HJHWNDCTZ47CCTID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