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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봄에 찾아온 사랑… 아프지만 황홀했기에 더 단단해진다

[특집 : 지금 문학은] 설렘과 떨림의 소설들
황지윤 기자
입력 2024.03.30. 04:23

최진영은 '오로라' 작가의 말에 "'사랑'이라는 커다란 돌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영영 변치 않을 것만 같지만, 너무도 변화무쌍하고 다채롭다'고 썼다. 변화무쌍한 사랑을 겪으며 우리도 새롭게 태어난다. /일러스트=이철원


격정적인 떨림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나. 스쳐 지나가는 듯했던 찰나의 순간이 모든 것을 바꾸기도 한다.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어떤 강렬한 경험. Books가 매달 선보이는 ‘지금 문학은’ 특집, 이달의 키워드는 ‘떨림’이다. 나도 모르게 봄기운에 취해버렸다면 관능과 상처, 열정 등 사랑의 여러 면면을 다룬 소설을 펼치며 봄기운에 더욱 젖어드는 건 어떨지. 임경선·최진영·찬쉐의 소설은 그런 떨림의 순간을 써내려 간다. 임경선은 느린 춤을 추듯 관능적으로, 최진영은 아프고 처절하게 꾹꾹 눌러 담는다. 찬쉐는 달뜬 순간을 향해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뒤를 돌아보게 하는 관능적 묘사

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소설 | 토스트 | 216쪽 | 1만8000원

어느 점심시간, 고궁박물관 한쪽의 작은 정원. ‘나’는 체크무늬 셔츠에 사원증을 목에 건 광화문 직장인 틈바구니에서 하얀 피부에 긴 앞머리를 한 당신을 마주친다.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는 당신의 분위기에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골목 귀퉁이의 작은 단골 카페에서 또 한 번 당신을 만난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나지막이 인사말을 건넨다. 그리고 당신이 나와 자리를 합치겠다며 불쑥 일어난다.

임경선의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은 광화문 직장인인 여자 주인공 ‘나’와 피아니스트인 ‘당신’의 사랑 이야기. 일인칭 구어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사랑의 황홀과 고통을 겪는 한 사람의 내면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소설집 ‘호텔 이야기’ ‘가만히 부르는 이름’ 등 동시대 사람들의 애틋한 이야기를 특유의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담아내는 임경선이 또 한 번 독자를 떨리게 한다. 관능적인 묘사에 책을 읽다 여러 번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나와 당신의 비밀스러운 피아노 스튜디오 만남에 초대받은 것 마냥. 경복궁~광화문 일대가 익숙한 독자라면 소설 속 공간 덕에 한층 더 설렐 것이다.

◇누군가는 비밀을 묻고, 청춘은 사랑을 나눈다

오로라

최진영 소설 | 위즈덤하우스 | 88쪽 | 1만3000원

최진영의 단편소설 ‘오로라’는 뜻하지 않게 제주로 도피한 ‘너’의 이야기다. 1인칭이 아닌 2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나’는 없이 너만이 존재하는 불안이 읽힌다. 너의 독백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언뜻 긴 산문시 같기도 하다.

기혼인 상대와 사랑에 빠졌던 너는 그의 거짓말을 책망하면서도 사랑을 감출 수 없어 괴로워한다. “당신은 누군가의 비밀이 되어본 적 있나요? 비밀은 묻어 버려야지.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습니까? 들키면 안 되니까.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 꾹꾹 눌러 담은 너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너는 죽은 새를 묻어주며 그를 마음에 묻고, 새로운 사람의 손을 잡는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의 고통스러운 떨림과 새로운 사람을 향한 호기심 어린 떨림이 겹쳐지는 절묘함을 포착했다.

격정세계

찬쉐 소설| 은행나무 | 688쪽 | 2만원

임경선과 최진영이 ‘나’와 ‘너’, 즉 사랑에 빠진 한 개인의 내면세계를 파고든다면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히는 중국 소설가 찬쉐의 장편소설 ‘격정세계’는 다른 결의 떨림이다. 청춘 연애소설의 외피를 썼지만, 지리멸렬해진 현대인의 삶에 문학과 사랑이 격정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소설.

표범이 카페를 어슬렁거리고, 검은 고양이가 달빛 아래에서 운다. 상상과 현실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가상의 도시에서 활동하는 ‘비둘기 북클럽’ 멤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샤오쌍과 헤이스, 한마와 페이, 이 아저씨와 샤오마 등 여러 인물의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를 통해 문학과 사랑에 대해 말한다. “정말 이상하죠? 난 먼저 문학과 사랑에 빠졌고 그다음에 페이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둘이 마치 하나인 것 같아요.” 한마의 말에 샤오쌍이 이렇게 답한다. “이상할 것 하나 없어. 문학이 뭐야? 바로 사랑이야. 그래서 네가 사랑에 빠진 거라고.

◇떨림, 상처, 과거와의 안녕

서울과 제주, 가상의 중국 도시. 나와 당신, 너, 북클럽 멤버들. 각기 다른 이야기지만 세 소설은 한데로 모아진다. 강렬한 떨림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는 것. 소설 ‘오로라’의 너는 “그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묻고 새로 시작할 것이다” 되뇌며 “안녕하세요, 저는 오로라입니다”라며 새 이름을 말한다.

임경선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쓴다. “깊은 상처는 오직 내가 깊이 사랑했던 사람만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 상처로 인해 우리는 질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소설 속 나는 당신과 함께 오기로 했던 덕수궁 벚꽃나무 아래에서 혼자 사진을 찍으며 당신에게 비로소 작별을 고한다. 그 작별은 과거의 나에게 고하는 안녕이기도 하다.

임경선
최진영
찬쉐
 호텔 이야기
가만히 부르는 이름
 

 

원글: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4/03/30/UCETV2RSEBG7ZLCR3YGZYCOY5I/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