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4.05.28. 00:08
나는 자동차 블랙박스의 녹음 기능을 꺼 놓고 다닌다. 운전대만 잡으면 세상에 불만이 많아져 혼잣말을 하게 되는데 그게 고스란히 녹음된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다. 만일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블랙박스를 경찰에 제출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꼬리 물기로 꽉 막힌 교차로에서 교통 경찰의 무능과 태만을 실컷 규탄하다가 사고가 났을 때, 나의 블랙박스는 담당 경찰관에게 아주 인상적인 선입관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그러니 블랙박스는 영상 녹화 기능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블랙박스 오디오가 중요한 기능이라는 사실은 최근에 알았다. 사고 직전 경적을 비롯한 경고음을 내거나 들었는지 여부가 중요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별수 없이 녹음 기능을 켜야만 했다. 이제 혹시 사고가 나면 영상과 녹음을 동시 심사받는 수밖에 없다.
김호중이 삼켰는지 매니저가 삼켰는지 분명치 않지만 누군가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삼켰다고 한다. 두께가 얇긴 해도 손톱만 한 플라스틱을 삼키려면 눈을 질끈 감고 꿀꺽 삼켜야 했을 것이다. 물과 함께 삼키지 않았다면 꽤 고역이었을 테다. 차량 석 대 메모리 카드가 모조리 없어졌다니 다 먹어 치운 모양이다. 어쩌면 구리 호텔 앞에서 맥주를 산 이유가 그것인지도 모른다.
왜 메모리 카드를 부수거나 태우거나 하수구 같은 데 버리지 않고 목구멍으로 삼켰을까. 나는 김호중 사건에서 이것이 가장 궁금하다. 메모리 카드를 삼키는 건 스파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다. 현실에서는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 저항군 지도자가 갑자기 들이닥친 이스라엘군에게 생포된다면 기밀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삼킬 수도 있다. 김호중의 블랙박스에 무슨 장면과 소리가 담겼기에 삼켜 버려야 했을까.
처음엔 블랙박스에 메모리 카드가 아예 없었다고 했다. 인생 첫 차로 배기량 998cc짜리 기아 모닝을 타는 사람도 메모리 카드는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3억 넘는 벤틀리에 깡통 블랙박스 달고 다녔다는 김호중의 진술은 경찰관들의 정의 구현 의지를 결정적으로 고양했을 것이다. 경찰이 어떤 영화 대사처럼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고 말한다면 아주 많이 화가 났다는 뜻이다.
김호중은 휴대폰 비밀번호도 내놓지 않았다. 요즘 휴대폰엔 메모리 카드가 내장돼 있고 휴대폰을 삼킬 수도 없으니 비밀번호를 꽁꽁 숨겼다.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없앨 정도라면 휴대폰에는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수사 선상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휴대폰 없애고 새 휴대폰 장만하는 것이다. 돈봉투 뿌렸다가 작년에 구속된 정치인도 검찰에 출두하면서 떳떳한 척 휴대폰을 제출했는데 새로 산 휴대폰이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누구나 1, 2년에 한 번씩 휴대폰 바꾸지 않느냐”였다. 내가 아는 한 삼성전자 임원들 말고 그렇게 자주 휴대폰 바꾸는 사람은 거의 없다. 휴대폰을 한강에 던져 버리지는 않았으니 김호중이 정치인들보다는 덜 뻔뻔하다고 할까.
메모리 카드가 처음 출시됐을 때 저장 용량은 변변치 못했고 크기도 컸다. 당시 디지털 카메라를 쓰던 사진기자들은 메모리 카드를 여러 개 들고 다녀야 했다. 가로 15mm 세로 10mm인 마이크로 SD카드가 디지털 기기에 두루 쓰이면서 그 용량도 크게 늘었다.
흔히 쓰이는 256GB짜리 메모리 카드엔 알파벳 기준으로 2560억자(字)를 저장할 수 있다. 이 글 한 편의 디지털 크기는 15KB쯤이므로, 메모리 카드 한 장에 이런 글 1700만건을 담을 수 있다. 어림잡아 꽤 두툼한 책 20만권 분량이다. 디지털 사진 크기가 2MB가량이면 A4 용지 크기로 인화할 수 있는데, 그런 사진 12만장을 저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메모리 카드 한 장에 사진과 글로 표현한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얼마든지 들어가고도 남는다.
스마트폰 쓰고 블랙박스 달린 차를 타고 다니는 이상, 우리는 인생을 거의 통째로 메모리 카드에 기록당하는 신세다. 이제 메모리 카드는 눈과 귀와 입의 연장을 넘어서 육체보다 소중하게 대접받는다. 김호중은 구속됐지만 메모리 카드는 자유를 얻었다.
혹여 인생이 통째로 발각될 위험에 처했을 때 메모리 카드를 꿀떡 삼키지 않으려면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일체의 디지털과 연을 끊고 수많은 불편과 차별을 감수하든지, 메모리 카드 열어 봐야 별것 없는 삶을 살든지다. 낮말도 밤말도 죄다 메모리 카드가 듣고 있기 때문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essay/2024/05/28/EOKYGIBYGJDSHOTECPQQ7MG7E4/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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