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실장
입력 2024.10.04. 00:02 업데이트 2024.10.04. 00:38
정원에 물 주는 일을 좋아한다. 이른 아침 목마른 식물들에게 물을 줄 때 비스듬한 햇살에 수많은 물 분자들이 반사돼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는 일과 크고 작은 잎들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이 크다. 무엇보다 식물들이 생기를 되찾는 모습을 보면 내 안에 있는 건조함과 권태로움에도 생기가 돋는다고 할까.
특히 높은 습도를 좋아하는 다양한 고사리류(잎 모양이 양의 이빨을 닮아 ‘양치류’라고도 한다)를 모아놓은 정원은 매일매일 뿌리와 줄기, 잎이 마르지 않도록 전체적으로 충분히 수분을 공급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물 주는 일이 가장 즐거운 공간이다. 고사리류는 공룡의 시대를 향유한 대표적인 식물이다. 그래서 공룡이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쥐라기” 시대의 숲을 상상해 보면, 가장 먼저 고사리 정원이 오버랩된다.
식물의 탄생과 진화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온 주제다. 오늘날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 중에는 그 역사가 공룡이 출현한 2억3000만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종류가 많다. 예를 들어, 4억 7000만년 전 처음 육지에 등장한 이끼류, 3억6000만년 전에 나타난 고사리류, 그리고 2억8000만년 전부터 번성하기 시작한 소철류를 꼽을 수 있다. 도심 속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는 은행나무 역시 2억7000만년 전 처음 출현한 이후 거의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나무 중 하나다. 공룡과 함께 살던 식물들이 ‘살아 있는 화석’처럼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은 정말 신기하고 경이롭다. 우리가 집에서 키우는 반려식물이 수억 년의 진화 역사를 지닌 지구의 선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식물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반면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에 등장한 지 고작 30만년밖에 되지 않았다. 식물의 역사에 비하면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만약 이끼류 같은 육상식물이 처음 나타난 시점을 0시로 하여 지금까지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놓고 본다면, 양치류는 새벽 5시 반쯤, 소철류는 오전 9시 반쯤 등장했고, 정오가 좀 지나 공룡이 출현했다. 최초의 꽃식물과 벌은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그리고 인류는 자정 직전인 밤 11시 59분에야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 된다.
일찍이 식물학자들은 지구에 존재해온 다양한 식물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기록하고 보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유럽에서는 왕실과 귀족의 후원으로 식물원이 만들어져 전 세계 식물 자원을 수집했다. 16세기부터 등장한 ‘오랑주리(오렌지 온실)’는 다른 대륙에서 온 열대와 아열대 식물을 겨울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크고 정교한 유리 온실이 만들어졌다.
18세기 중반 설립된 영국의 큐 왕립식물원은 전 세계의 다양한 식물 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762년 중국에서 들여온 회화나무와 1775년 남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이스턴케이프 소철은 지금도 큐 왕립식물원에서 자라고 있다. 설립 후 260여 년이 지난 지금 큐 왕립 식물원에는 전 세계에서 수집된 2만 7000 종류 식물의 보금자리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야생에서 사라졌거나 멸종 위기에 처해 있기에, 큐 왕립식물원의 식물 컬렉션은 전 지구 차원에서 더욱 중요한 자원이다.
식물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종종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멸종된 줄 알았던 메타세쿼이아는 1941년 중국의 식물학자에 의해 새롭게 발견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덕분에 이 나무는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온대 지방에서 널리 자라고 있다. 또한 2억년 전 공룡의 시대에 번성했던 울레미소나무 역시 이미 멸종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1994년 호주 울레미 국립공원에서 살아있는 나무가 발견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 식물학의 황금기에는 많은 식물들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이동했는데, 여기에는 ‘워디안 케이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물학자 너새니얼 워드가 나무와 유리를 이용해 만든 이 혁신적인 상자는 차나무, 고무나무, 난초 등 귀한 식물들이 수개월에 이르는 긴 항해를 거쳐 다른 대륙으로 운반될 때 말라 죽거나 오염되지 않고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줬다. 열대우림부터 산악지대까지 전 세계 1만종이 넘게 분포할 만큼 다양한 패턴과 질감을 지닌 양치식물은 대부분 높은 습도를 필요로 하는데, 워디안 케이스 덕분에 무난하게 유럽에 소개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고사리 열풍’을 뜻하는 프테리도마니아(Pteridomania)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고, 양치식물 전용 온실인 퍼너리(Fernery)가 등장하기도 했다.
수억 년 동안 지구 상에는 수많은 식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기후변화, 화산 활동, 소행성 충돌 등으로 인한 대멸종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는 제6의 대멸종 또는 인류세(Anthropocene) 멸종이라 불리는 위기를 맞았다. 인간 활동으로 인한 지구 환경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절실한 이 시대, 도시 정원사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 오늘날 도시는 단순한 콘크리트 정글이 아니다. 도시 정원사는 단순히 식물을 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민 과학자’ 혹은 ‘도시 식물학자’로서 식물의 역사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보전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수목원에서 일하다 보면 미래의 식물학자가 될지도 모를 어린이ˑ청소년의 방문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초롱초롱 눈망울로 하나하나의 꽃과 잎을 모든 감각으로 흡수하는 아이들에게 식물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가장 큰 보람을 안겨준다. 온 가족이 함께 정원을 가꾸고 다양한 식물과 친숙해지는 시간을 갖는다면 지속 가능한 지구 환경을 만들어갈 새로운 초록 세대와 미래의 식물학자를 더 많이 길러내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10/04/QBBK2SRO6FEDHOTNAHO32KVYP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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