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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좌

신수진의 사진 읽기[3] '찍는' 대신 암실에서 '만드는' 사진

[신수진의 사진 읽기] [3] '찍는' 대신 암실에서 '만드는' 사진
신수진/사진심리학자 

 

제리 율스만, 무제 /1972, 한미사진 미술관 제공.

 

제리 율스만(Jerry Uelsmann·1934~)이 1972년에 만든 이 작품에는 거대한 손과 여인의 나신, 입술과 깍지 모양의
식물, 거대한 자연 풍경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각각의 소재를 따로따로 한 장씩 보았다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장면들일 수 있겠지만, 각각의 사진 원고들의 위치와 크기를 정교하게 계산해서 중첩시킨 한 장의
사진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다.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 즉 단 한 번의 순간 포착으로 결정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의 방법과는 정반대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그는 1960년대부터 여러 장의 사진에 담긴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엮어 초현실적 장면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디지털 기술의 확산으로 필름과 암실 작업이 구시대의 유물
처럼 되어버린 듯한 지금도 그는 암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여러 장의 필름 원고를 차례로 중첩시켜 인화하는
세공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는 사진을 '찍는(taking)' 대신 '만드는(making)' 사람이 되었다.

 

사진 속 여인은 요람과도 같이 커다란 손에 안긴 듯 누워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엄지공주처럼 작아 보이는
그녀는 힘없이 나약한 모습이지만 선명한 눈빛은 그녀에게 가늠하기 어렵도록 숨겨진 이면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녀의 몸 한가운데에 놓인 세계는 변화무쌍한 자연과 영원불멸의 생명을 동시에 상징하는 듯한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면을 만들었는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있다. 이러한 작품의 완성은 작가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리 율스만이 현존하는 최고의 스토리 텔링 작가라는 평을 얻은 것은 그의 사진이 한 가지의 명료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장면들을 제시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른 상상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핵심적인 역할인 것이다.
상상을 자극하는 힘이야말로 현대 예술이 추구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시대가 변해도 예술이
기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이다.

 

입력 : 2013.05.31 03:02


원문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5/30/20130530040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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