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乙巳年, 뱀을 말하다
박서련 소설가
입력 2025.01.01. 00:32
을사년 새해 첫날에 신문을 보는 분들께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가장 복될지를 고민하다 한 사람을 떠올렸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이경손(1905~1977). 조선일보에 장편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던 그는 유독 신문이라는 매체와 가까웠는데, 이유인즉 어떤 주제로 어떤 장르의 글을 청하든 막힘없이 써서 틀림없이 건네주는 편리함과 성실함 덕이었다. 하여 그 자신은 스스로를 ‘촙수이 문사’라 자조하기도 했다. 촙수이란 요즘으로 치면 중화요리점의 잡탕밥과 흡사한 메뉴. 빠르고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믿음직한 요리지만,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것을 꼽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점이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했으리라.
한국의 1세대 영화인이었던 그는 일명 ‘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영화 ‘장한몽’을 연출하기도 했다. 업적에 비해서는 언급되는 일이 드문 편이다. 그런 그를 나는 어찌 알고 있는가 하면 작년에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카카듀)을 한 권 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그가 오촌 조카 현앨리스와 손잡고 지금의 인사동 일대에 최초의 서구식 끽다점, 즉 카페를 창업한 이야기를 다뤘다. 창업 도전 전후로 그가 겪은 온갖 실패도 함께 엮었다.
그러나 내가 이 소설에 담아내려 한 궁극은 이경손이나 현앨리스 같은 근현대 인물 개개인의 사사로운 체험만이 아니었다. 이경손의 실패담은 3∙1운동의 후일담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의 경력은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운데서 시작됐고, 함께 카페를 창업한 현앨리스는 3∙1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상하이로 가져간 목사 현순의 딸이었다. 사촌 매형 현순을 동경했던 이경손은 그를 본받아 신학대학에 다닌 적도 있다. 생애 내내 3∙1운동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그가 마침 1905년 을사년 태생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러고 보면 묘연이다. 뱀띠 소설가라는 이유로 을사년 뱀띠 해 특집 원고를 청탁받은 내가, 실존 인물이었던 을사년생 소설가 겸 영화감독을 주인공 삼아 역사소설을 쓴 적이 있고,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조선일보는 내 소설의 주인공 이경손 역시 장편소설을 연재한 적 있는 지면이라는 것. 서로의 꼬리를 물어 기다란 원을 이루는 뱀들의 형상이 아닌가. 역사라는 것의 속성 또한 그런 듯싶다. 우리는 그것이 수십 년 전, 한 세기 전, 아주 오래된 과거의 일일 뿐이라 착각하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멀게 느낀 그 일이 우리 눈앞에서 재현될 때도 있는 것이다.
갑자가 돌아 올해는 을사년이다. 보통 뱀띠 해가 아니라 소위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의 어원이 된 바로 그 을사년이다. 두 갑자 전에는 을사늑약이 있었고 한 갑자 전에는 한일협정이 있었다. 이렇게만 보아서는 을사년마다 국운이 크게 요동치는 것인가, 사뭇 긴장도 될 법하다. 그러나 어느 해라고 평온하기만 했던가. 돌아보면 한 해 한 해 크고 작은 아픔이 있었고, 같은 해에 뜻하지 않은 기쁨들도 있었다.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해에 일어났다면 극복하기 어려웠을 일이라도, 검질긴 생명력의 상징인 뱀의 해에라면 이겨낼 수 있다. 지난 을사년의 아픔들은 도리어 을사년에 일어났기에 보다 빨리 극복된 거라 믿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2025년, 새로운 을사년은 과연 어떨까. 사실 을사년은 새 을(乙) 자에 뱀 사(巳) 자를 쓰니 상상력을 발휘해 날개 달린 뱀으로 해석해 봄 직도 하다. 뱀에게 날개가 달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진화를,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온몸이 꼬리인 동시에 몸통이기에 어떠한 고난도 유연하게 통과해내는 뱀, 그 몸에 날개가 돋쳐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2025년을 대하는 우리가 갖춰야 할 태세, 청사진(靑寫眞) 아닌 청사(靑巳)의 진(陣)일 것이다.
이경손 |
촙수이 |
장한몽 |
카카듀 |
원글: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5/01/01/KUEEK3GVYVHORAMGAU2XFFRHWA/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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