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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장수 기업 독보적 세계 1위 일본… 하지만 왜 국가경쟁력은 추락하나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입력 2025.01.12. 23:58

핵심은 '연명'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佛 생고뱅의 역사를 보라
베르사유궁 '거울의 방'이 기원, 360년간 연매출 72조로 성장
제품 25%는 최근 5년 이내 개발… 생존전략의 핵심은 늘 '변화'다

그래픽=이철원


1919년 1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파리강화회의가 시작되었다. 1월 18일은 프랑스에는 치욕의 날이었다.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프랑스의 자존심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한 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차 대전 승전국 프랑스가 굳이 이 날짜를 선택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파리강화회의의 결과 거울의 방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며 48년 전 이곳에서 탄생한 독일 제국이 몰락했다. 이처럼 거울의 방은 정치적인 곳이지만, 한편으로 이곳을 만든 어느 회사의 이야기는 장수 기업의 생존 전략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1643년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의 어린 시절은 귀족들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1661년 친정을 시작한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새로운 왕궁 베르사유를 짓기 시작한다. 권력을 위해서는 과학이 필요했다. 베르사유의 화려한 실내 장식은 사치로 보이지만, 장식 곳곳에 천체 관측 기구와 지구본을 새겼다. 또한 베르사유 방 배치에는 지동설에 해당하는 태양중심설을 반영했다. 갈릴레이가 가택 연금을 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으니, 대담한 시도였다. 베르사유에 1400개에 달하는 분수를 위해 하루 3200t의 물을 공급하는 장치를 만든 것도 과학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과학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 경제의 걸림돌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비싼 제품들. 특히 베네치아가 독점하던 거울로 국부 유출이 심각했다. 거울 제조에는 유리 표면을 매끈하게 하는 연마와 같이 어려운 기술이 필요했지만, 당시 이런 기술이 없던 프랑스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1665년 왕실 자금을 투입해 공장을 세워 국산화에 도전한다. 베네치아의 필사적인 견제에도 1672년 드디어 국산화에 성공하며 더 이상 수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여기서 만들어낸 국산 거울로 1678년부터 베르사유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1684년 완성한 것이 거울의 방이다. 이처럼 거울의 방은 프랑스 과학의 자존심이다.

이후 왕립 거울 공장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민영화되었고, 이름도 생고뱅(Saint-Gobain)으로 바뀌었다. 왕실 지원이 사라지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신이 필요했다. 주력이던 거울을 중심으로 고성능 유리와 채광창 등으로 제품을 확장한다. 1851년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영국 런던에 유리로 지어진 초대형 건축물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에 참여할 정도로 생고뱅은 민첩했다. 미국의 윌슨산 천문대의 대형 망원경 역시 생고뱅의 유리 기술로 가능했고, 여기서 빅뱅 이론이 탄생하며 인류는 우주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지난 360년 동안 변화를 거듭한 이 회사는 2023년 현재 직원 16만명에 연 매출 479억유로(한화로 약 72조원)에 이르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그래픽=이철원


장수 기업은 이처럼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았다.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은 경쟁력이 되고, 여러 고비를 넘기며 쌓인 위기 대처 능력은 소중한 경험 자산으로 이어진다. 장수 기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력이 강한 기업 생태계가 구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에 비해 장수 기업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런 이유로 우리 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장수 기업의 부족에서 찾기도 한다. 2022년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는 100년 넘은 장수 기업이 무려 3만3079개가 있고, 미국은 1만2780개, 독일은 1만73개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고작 10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장수 기업이 많다고 반드시 산업 경쟁력이 높은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18년 일본 상장사의 평균 수명은 89년으로 미국의 6배에 이르지만 회사당 시가 총액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 오히려 미국 회사의 평균 수명은 줄고 있지만, 성장 속도는 일본보다 훨씬 빠르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일본 장수 기업의 81%가 매출액 10억엔 미만의 소기업이라는 점은 이들의 생존 전략이 변화보다는 연명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기업의 수명이 늘어가는 동안 한때 세계 1위였던 일본의 국가 경쟁력은 30위권으로 떨어졌다. 유독 일본에 장수 기업이 많다는 것이 오히려 성장 둔화의 원인으로 신문은 분석한다.

한편 미국 나스닥에 2024년 신규 상장된 회사 수는 192개였지만 상장폐지는 395개에 달한다. 같은 이유로 미국의 S&P500 기업들의 평균 수명은 1958년에는 61년이었으나 2018년에는 15년으로 줄었다. 반면 한국은 코스닥 신규 상장사가 폐지된 숫자의 3배에 이르지만 시장은 정체되어 있다. 한계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파산이 상대적으로 쉬운 미국에서는 경쟁에 뒤처진 기업들이 빠르게 정리된다. 이러면 한계 기업에 자금을 쏟지 않아도 되고, 기술과 인재는 새로운 기업으로 이어져 생태계는 더 건강해진다.

강한 기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기업이 강한 것이다. 따라서 장수 기업은 강한 기업이다. 그런데 장수 기업의 DNA는 하나의 기업에서만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으로 이어갈 수도 있다. 시장이 요구하는 기술은 변하기 마련이고, 중요한 것은 얼마나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가이다. 360년 역사의 생고뱅이지만 제품의 25%는 최근 5년 이내에 개발되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끊임없는 변화만이 생존 전략의 핵심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1/12/2ALAEOAOVZATNE2D76GJUMQJZ4/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