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논설위원
입력 2025.04.09. 22:31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사건이 터졌을 때 북한 노동신문은 ‘남조선 무장 유격대가 청와대 앞까지 공격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김일성이 무장 공비를 내려보냈다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북 주민은 남한 내 친북 유격대가 일을 벌인 줄 알았다. 북 공비들이 대거 사살되고 한 명은 투항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외교관 출신 탈북민은 “해외 공관에 나가서야 ‘김신조’란 사람이 붙잡혔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북은 김신조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1·21 사태 직후 피랍된 푸에블로호의 미군과 김신조를 교환하자는 제의도 묵살했다. 김신조의 북한 가족은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김신조는 2년 넘게 조사를 받고 사회로 나왔다. 어느 날 만취한 청년이 뒤통수를 갈기며 “너 때문에 군 생활 피 봤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1·21 직후 군 제대가 미뤄지고 훈련 강도도 달라지자 원성이 김신조에게 쏠렸다. 군경 피해자 유족을 만나면 ‘죽일 놈’이 돼야 했다. 김씨는 “사건 당시 나는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 김씨의 총기류에는 발사 흔적이 없었다. 결혼하고 자녀를 뒀지만 감시는 계속됐다. 자녀가 반공 교육을 받다가 ‘김신조 습격’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런 자녀를 보는 아내 가슴도 타들어 갔다.
▶1987년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청진항에서 배로 탈북했다. 동해에서 표류하다 일본으로 갔는데 남한행을 고민했다. 당시 정부는 같은 청진 출신인 김신조를 일본으로 보냈다. 김씨가 “아니, 만철이형 아니오. 나 신조요, 정미소 집 아들!”이라고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반공 강연 등을 많이 다닐수록 ‘무장 공비’ 이미지만 굳어졌다. 199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조용히 목회자 삶을 살던 김씨가 2010년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공격 이후 “꼭 할 말이 있다”며 연락을 해왔다. 그는 “천안함 폭침이 터졌을 때 바로 정찰총국 소행임을 알았다”고 했다. 자신이 인민무력부 정찰국 출신인데 정찰국은 1968년 당시 벌써 어뢰로 남한 함정을 공격하는 훈련을 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남한은 북한 정권을 너무 모른다”는 말을 반복했다.
▶김신조씨가 어제 83세로 별세했다. 30여 년 전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썼다. 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담당할 수밖에 없었던 악역” “미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던 방황”이라고 적었다. 이제는 그 짐을 편히 내려놓길 바란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4/09/VAN3BCZ3GNBF5BOQ7PTMADIM3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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