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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AI 강국을 만들겠다는 새 정부가 잊지 말아야 할 것

박건형 콘텐츠앤AI전략팀장
입력 2025.06.30. 23:55

일러스트=이철원


1880년 프랑스 정부는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게 볼타상을 수여했다. 벨은 상금 5만달러로 미국 워싱턴에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벨 연구소(Bell Labs)’에서 전파망원경, 형광 현미경, 트랜지스터, 레이저, 광전지, 디지털 카메라의 핵심 기술 전하결합소자(CCD), 컴퓨터 운영체제 유닉스, 프로그래밍 언어 C·C++ 같은 성과가 탄생했다. 디지털 세상의 토대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벨 연구소 연구원들이 받은 노벨상만 11개에 이른다.

인공지능(AI)의 역사도 벨 연구소에서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벨 연구소에서 일하던 26세 청년 클로드 섀넌은 영국에서 찾아온 수학자를 만난다. 세계 최고의 암호 해석 전문가로 꼽히던 그의 이름은 앨런 튜링. 섀넌과 튜링은 매일 차를 같이 마시며 수학을 활용해 디지털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특히 섀넌은 튜링이 고민하고 있던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라는 아이디어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섀넌은 ‘계전기와 스위치로 이루어진 회로의 기호학적 분석’과 ‘정보통신의 수학적 이론’이라는 논문을 썼다. 수학을 이용해 정보를 비트라는 단위로 수치화할 수 있으며, 압축해 정확하게 전달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들 논문에서 지금의 컴퓨터 회로 설계 방식과 AI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섀넌은 1950년 미로(迷路)와 금속 쥐, 전기 회로를 이용해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그리스 신화 속 영웅에서 이름을 딴 최초의 AI 기계 ‘테세우스 머신을 만들었다. 테세우스 머신 속 금속 쥐는 미로를 탐색하면서 학습을 거듭해 막힌 길을 피해가며 최단 거리 탈출 방법을 찾아낸다. 75년 전의 일이다. 오픈AI·구글과 함께 글로벌 AI 시장을 지배하는 앤스로픽이 AI 모델 이름을 ‘클로드’로 지은 것도 섀넌이 컴퓨터와 AI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섀넌의 위대한 업적도 무(無)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다. 섀넌이 정보 이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영국 수학자 조지 불의 연구 덕분이다. 가난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불은 독학으로 퀸스칼리지 수학과 석좌교수가 됐다. 그는 철학의 영역이었던 논리학에 대수학을 결합해 ‘참’과 ‘거짓’만으로 문제를 푸는 수학, 이른바 ‘불대수’를 창안했다. 아무도 연구의 가치를 몰랐지만, 불이 사망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난 다음에야 섀넌이 참과 거짓이라는 불대수의 논리를 0과 1이라는 컴퓨터의 이진법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AI 혁명은 한 수학자의 호기심과, 버려진 연구의 활용법을 고민한 또 다른 수학자의 탐구심 덕분에 가능했다. 불이 ‘논리의 수학적 분석’을 쓴 것이 1847년이었으니 현재의 AI는 178년에 걸쳐 자라온 것이다.

AI의 역사는 실패와 절망, 냉소와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 쓸모없는 연구라며 세계적으로 외면받는 ‘AI의 겨울’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때마다 과학자들은 기초과학에서 돌파구를 찾았고, AI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연구들이 AI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미지·텍스트 같은 데이터를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도록 묶는 방법은 선형대수학의 행렬, AI의 추론은 확률과 통계를 활용한다. AI 학습의 핵심인 딥러닝(심층학습)은 미분에 근간을 두고 있고, AI의 구조를 형성하는 인공신경망은 뇌과학자들이 만들었다. AI의 구루(스승)로 불리는 거장 대부분의 학문적 출발점이 수학·생물학·물리학·통계학 같은 기초과학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정말 사람처럼 생각하고, 언젠가 사람을 뛰어넘을 궁극의 AI를 만드는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장벽이 등장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 장벽을 넘을 실마리가 세계 어딘가의 기초과학 연구실에서 태동하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소버린(Sovereign·주권) AI를 만들어 ‘AI 세계 3대 강국’이 되겠다는 새 정부의 AI 전문가들이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와 함께 꼭 생각해줬으면 한다. 기초과학이 없으면 AI도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레이엄 벨
클로드 섀넌
앨런 튜링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머신
클로드
조지 불
논리의 수학적 분석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5/06/30/ZY7ZFI3L7RGQ5O27KWBCZLJKQI/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