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부족 정치와 로컬 미디어… '글로벌 한국' 갈 길 멀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입력 2025.09.04. 23:50

BBC는 가자지구 기근, CNN은 우크라 참상
中 CGTN은 유창한 영어 방송으로 중국 알려

국내 방송사 뉴스는 과거 권력 난도질로 점철
체급 커진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 안 해

국민을 우물 안 정치와 한반도에만 붙잡아 두니
소통에서 낙제점… 직무 유기를 넘어 죄악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가자지구에 눈물 마를 겨를이 없어 보인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사이로 뼈만 앙상한 아이들과 초췌한 여인들이 오간다. 어떤 팔레스타인 남성이 영국 BBC 기자가 내민 마이크에 분노와 무력감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말살하고 내몰려는 거예요.” 원조 길이 막힌 가자지구 사람들이 기근에 신음한다. 이스라엘이 구호물자 트럭이 오가는 통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분노한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요트처럼 생긴 배에 구호품을 싣고 가자로 떠났다. 이스라엘 측은 3개월 전 그를 추방했으나 이번에는 체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상황도 도대체 나아질 조짐이 없다. 러시아가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게 벌써 3년 전이다. 그 사이 미국 대통령이 바뀌어 종전과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고개를 드는 듯하더니 다시 제자리다. 우크라이나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인 안드리 파루비가 르비우 도심에서 피살당하는가 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에 대규모 공격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벨고로드를 공격했다고 CNN 등은 전한다. 유럽연합은 동결된 403조 규모의 러시아 자산 활용 방안을 논의 중이다. 그중 일부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쓰일 분위기다.

전쟁의 원인을 서방 탓으로 돌리고 있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중국 톈진에서 열린 다자 협의체 상하이협력기구(SCO: Shanghai Cooperation Organisation) 정상회담에 참석해 다자주의 국제 질서 대열에 합류했다. 중국발 국제 TV 방송인 CGTN은 SCO 회담 관련 뉴스와 함께 이어진 중국 전승절 열병식 행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언뜻 보면 중국 채널인지 알기 어려운 CGTN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진행자들을 앞세워 중국의 반(反)서방 노선을 완벽한 서방의 문법으로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중국 역사는 다큐멘터리로 알기 쉽게, 전통문화는 세련된 화면으로 아름답게, 현대 중국은 중앙아시아와 협력을 다지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전한다. 서방(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사회 문제를 심도 있는 기획 취재로 비판한 프로그램도 빼놓지 않는다. 나무랄 데 없는 국영 글로벌 선전 매체의 전형이다.

싱가포르의 CNA(Channel News Asia)는 아시아 뉴스의 허브답게 다양한 뉴스를 촘촘하게 전한다. 지금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서민은 굶는데 국회의원이 과도한 특혜를 누리는 데 분노한 국민이 전국에서 들고일어난 것이다. 시위가 격해지며 사망자가 7명이나 나오자 국회의원들은 급하게 외국 여행 계획도 보류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이 역대 가장 더운 여름을 보냈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나라 여름이 유난히 더운 건 알았지만 일본도 같은 사정인지 CNA를 보고 알았다. 800명이 사망한 아프가니스탄 지진 현장에 특파원을 보내 구호물자를 받기 어려운 사정을 토로하는 탈레반을 인터뷰하고, 중국 전승절 행사 즈음해서는 중국과 다른 일본과 대만의 내러티브를 심층 보도했다. 싱가포르 치과가 너무 비싸 사람들이 치아 상태가 안 좋다는 기사도 있었다. 1년에 한 번 무료 스케일링을 받는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다.

그 밖에도 나라 밖에서는 소식이 넘친다. 볼리비아에서는 드디어 비트코인으로 상거래를 하는 상인이 나타났고, 네덜란드는 주 4일 근무에도 불구하고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며, 관세로 물가가 높아진 미국에서 중고 거래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 일본 NHK 월드는 신칸센이 얼마나 정확한지 특집 프로그램으로 제작하고, 할랄 푸드를 일식에 접목해 시장을 확장한 파키스탄인의 성공 스토리를 방영한다. 이런 채널들의 공통점은 모두 날씨 예보를 글로벌 스케일로 한다는 점이다. CNN은 수시로 세계 여러 도시 날씨를 전하고, BBC는 한때 세계를 지배한 국가답게 둥글게 돌아가는 지구 위성사진 앞에서 전 세계 도시의 날씨 상황을 상세하게 전한다. 요하네스버그, 도하, 울란바토르…. 그곳에 비가 오는지, 날이 개었는지, 방송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방송의 일기예보는 한반도 남쪽만 덩그러니 섬처럼 띄워놓고 중부 지방은 어떠니 남부 지방이 어떠니 알려주는 수준이다. 날씨뿐 아니다. 뉴스 역시 국내 뉴스 우선, 국제 뉴스는 끄트머리에 몇 개 전해주는 정도다. 머리기사는 주로 국내 정치 기사가 차지한다. 그것도 현재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권력을 난도질하는 뉴스들이다. 방송 뉴스 관계자들에게 중요한 건 이 땅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최우선, 나라 밖 인류 보편의 전쟁이나 인권 같은 문제는 뒷전이다. 적어도 뉴스 보도 순서를 보면 그렇다.

전 세계 주요국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관점에서 세상을 재구성하고 전파하는 데 열심인 동안 우리 공영방송은 권력이 바뀔 때마다 누구를 내쫓고 누가 경영권을 쥐느냐를 놓고 머리에 피가 나도록 싸움질이다. 적어도 모두의 공공재인 전파와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사용하는 공영방송사라면 대한민국과 지구촌을 연결해주고 우리나라 소식도 균형 잡힌 뉴스와 기획으로 알리는 데 자원을 집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은 그 정도로 지구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런 역동적인 시대에 국민의 눈과 귀를 국내 정치와 지역 날씨에 붙들어 놓는 것은 직무 유기를 넘어 죄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아무리 수출을 하고 한류가 아무리 ‘열일’을 해도, 지금 수준 국제 뉴스로는 국가 차원 글로벌 소통에서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그 배경에 부족 정치에 머문 우리 정치인들과 그에 보조를 맞춘 로컬 미디어들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9/04/RX4GUWKWDFEAJJJ7ZXKHBACBF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