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5.09.17. 23:50 업데이트 2025.09.18. 00:02
세상은 '텍스트힙' 대호황… 책 좋아하는 사람은 거꾸로 불편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 힙이 아니다, '찐힙'은 당신만의 것이어야

텍스트힙을 아십니까? 책을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지다를 뜻하는 힙(hip)이 합쳐져 텍스트힙이다. 처음으로 텍스트힙에 대해 말해준 사람은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텍스트힙? 그런 게 있대.” 입에 담기 어려운 뭔가를 발음해야 한다는 곤란함이 물씬 느껴졌다. 우리는 함께 웃었는데 우리가 책 때문에 고통받는 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집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게 책이라서 책이 주인인 집에 얹혀사는 것 같다. 이 책 중에 다 읽은 책은 20%도 안 될 것이며, 펴보지 않은 책도 상당하다. 아마 평생 읽지 않을 책도 있을 텐데 신간이 나오면 또 산다. 그래서 책은 점점 쌓여만 가고, 더 쌓일 예정이다. 나에게 책은 힙이 아니라 짐이다.
그런데 나는 책이 힙해서 책을 읽나? 전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책에 둘러싸인 삶을 꿈꾸게 되었다. 매일 책을 읽고, 매일 책을 쓰며, 매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삶을. 어쩌다 보니 꿈을 이루었다. 매일 책을 읽고, 매일 책을 쓰지는 않지만 책을 생각하고, 매일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살고 있으니. 하지만 읽지 않은 책도, 쓰지 않은 책도, 나를 둘러싼 모든 책도 부담스럽다. 나 같은 사람은 텍스트힙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궁금하기도 하다. 텍스트힙이라는 말은 대체 어떻게 시작된 걸까? 책 읽는 게 힙하다고 하면 힙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텍스트힙이라는 말에 실제적 효용이 있나?
텍스트힙이라는 단어가 독서의 확산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은 여기저기에 텍스트힙을 붙이는 중이다. 정약용 관련 행사에서도, 해외 작가 초청 행사에서도, 호텔에서 책을 읽자는 북캉스를 프로모션하기 위한 광고에서도 텍스트힙은 대호황이다. 텍스트힙이라는 말이 나만 이상한가 해서 작가가 아닌 두 사람에게 물었다. “텍스트힙 어때요?”라고. 책을 많이 읽진 않지만 좋아한다는 P의 답변은 이랬다. 책이란 참 좋은 건데 텍스트힙이라고 하는 순간 읽기 싫어진다고. 책을 만드는 사람인 K의 답변은 이랬다. “텍스트힙이라고 쓰는 순간 정말 없어 보여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책을 읽으면 있어 보여요’라는 말을 캐치프레이즈로 쓰는 것처럼 없어 보이는 건 없다는 데 공감한 순간이었다.

책을 읽는 데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궁금해서 읽고, 재밌어서 읽고, 좋아서 읽는다. 그저 읽고 싶어서 읽기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명확히 댈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텍스트힙이라는 말을 들으면 읽었던 책들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책을 읽으며 보냈던 시간이 퇴색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텍스트힙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그리고 텍스트힙이라는 말은 의아하다. 힙이라고 명명되는 순간 더 이상 힙이 아니라는 거,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던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면 희소성을 잃고 평범해지는데 그게 어떻게 힙일 수 있겠는가. 힙에 대한 나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모두가 힙하다고 하는 것은 힙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힙을 찾는 것이다. 한남동에서 금호동 쪽으로 가로지르는 길인 독서당로에서 그 사례를 엿볼 수 있다. 독서당로는 실존했던 기구인 독서당에서 왔다. 독서당은 선별된 문신들의 독서를 위한 장소였다. 조선 세종 때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책을 읽게 했는데,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한다. 사가란 ‘조정에서 관리에게 휴가를 줌’이란 뜻이니, 사가독서란 독서 휴가라고 할 수 있다. 독서당을 만들기 전에도 사가독서가 있었는데, 본인의 집이나 창의문 밖 장의사와 삼각산의 진관사가 권장되었다. 삼각산은 북한산의 옛 지명이고, 창의문은 지금도 있다.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는 사라졌으나 세검정초등학교 안에 장의사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책 읽기를 권하면서 책 읽을 곳도 권한다는 것이. 조정에서 책 읽을 곳으로 꼽는 곳들은 명승지로 유명한 곳이다. 삼각산과 세검정은 진경산수화의 단골 화재(畫材)이며, 독서당로 근처에 있던 독서당도 ‘독서당 계회도’ 같은 그림을 보면 경치가 수려했음을 알 수 있다. 산과 물이 있는 곳에서 책을 읽었다. 산과 물을 보며 책을 읽는 일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힙이라는 말이 없던 시대의 힙이랄까. 이 시대의 텍스트힙을 추구하는 자들도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이다. 그렇게 텍스트힙을 통해 자기만의 힙을 발견할 수 있기를.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9/17/VYH4WPKPTZFJXLFTP7ZU46GGJ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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