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종 의사
입력 2025.11.24. 23:33 업데이트 2025.11.25. 07:19
한 달 전, 내가 짐마대학 시절부터 아끼던 제자 요나스가 미국 병원 채용 추천서를 부탁했다. 내과 레지던트 수석을 놓치지 않던 그는 에티오피아 의학을 이끌 재목이었지만, 내과의사가 되자마자 수입이 좋은 남수단으로 떠났다. 1년 후 귀국했지만 병원에 취업하지 않고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을 준비했고, 지금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일반의로 일하고 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병리 전문의로 일하며 USMLE를 준비하던 아내도 합류했고, 이들은 머지않아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게 될 것이다.

요나스는 추천서를 부탁하면서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가 에티오피아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내 생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종종 질문하곤 했다. “외국인인 나는 여기서 환자들을 돌보는데 에티오피아인인 너희들이 외국으로 가는 것이 옳으냐?”고. 하지만 해외 진출을 꿈꾸는 이들을 질책할 수는 없다. 요나스가 두바이에서 일반의로 받는 보수는 그의 아내가 아디스아바바 정부병원에서 받는 보수의 70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의료 환경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이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0.17명에 불과해 WHO 권장 기준(1명)에 턱없이 못 미친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Flooding Strategy’라는 정책을 도입했다. 단기간에 대규모 의사를 양성(Flood)하고, 의무 복무로 공공 보건 의료인력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이 전략은 숫자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2000년 이전 3곳에 불과하던 의과대학은 현재 36곳으로 급증했다. 입학 정원도 3~4배 확대돼 짐마대학에는 한 학년에 350~400명이 입학하기도 했다. 그래도 에티오피아에서 의사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과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서 상위 5~10% 안에 들어야 의과대학에 응시할 수 있다. 입학 후 6~7년간 힘든 의학도의 길을 마쳐야 대학 졸업시험과 의사고시를 볼 자격이 주어진다.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지만 의사의 월급은 처참하다. 현재 수련의와 일반의의 월급은 한국 돈으로 고작 20만원, 전문의들은 30만원 정도다. 이것도 작년 파업으로 지난달부터 보수가 50% 인상된 금액이다. 이 월급으로는 주거비가 비싼 아디스아바바에서 생활할 수 없다. 수련의 대부분은 아디스아바바 외곽에 거주하며 출근에 2시간 이상 소비하고 있다. 힘든 수련의 시절, 삶의 질은 최저일 수밖에 없다. 전문의가 돼도 큰 차이가 없다. 대부분 다른 병원 2~3곳에서 투잡을 뛴다. 한 내과 동료는 “고교 시절 수석을 놓치지 않은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고, 반면 성적이 그저 그랬던 친구는 지금 차량 정비공이 돼 부자로 산다”며 한탄했다. 이 극명한 대비가 에티오피아 의료인의 현실이다.
이러한 환경이 유능한 의사들의 ‘브레인(brain) 유출’을 가속화한다. 의대생들의 공통 목표는 유럽이나 미국으로 진출하는 것이 됐고, 졸업하고도 취업하지 않은 채 USMLE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의사 수를 2만8000명 이상으로 늘리려 하지만, 졸업생들의 해외 이주율이 너무 높다. 월드뱅크 보고서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에서 교육받은 의사 중 약 30%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일하는 에티오피아인 의사가 더 많다는 주장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희망은 있다. 나라를 사랑하고 환자들을 돌보고자 하는 의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짐마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소야는 노르웨이로 갈 수 있지만, 자기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 주민들을 돌보며 살고자 한다. 해외 이주를 생각하는 의사가 주류인 사회에서 이런 희생적인 소수의 존재를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요나스 역시 미국에서 심장 전문의로 좋은 교육을 받아 더 유능한 의사가 된 후 에티오피아에 돌아와 환자들을 진료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가르친 에티오피아인 제자가 어느덧 2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환자를 먼저 챙기는 사명감을 가진 의사들이 주류가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한국에서도 USMLE를 준비하는 의사가 만만치 않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해 시작된 의정 갈등이 촉발한 씁쓸한 현실이다. 이들이 의대를 지망하고 입학한 때 꿈은 무엇이었을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곁에 머물며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는 것이 행복한 삶 아닐까? 이런 질문에 한국 사회가 답하지 못한다면 ‘브레인 유출’의 비극은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의사 유덕종(66)
1992년 ‘정부 파견 의사’ 1기로 선발돼 우간다로 갔다. 계약을 연장하며 아프리카에 남았고 지금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길러낸 의사만 4000명. 아산상, JW성천상 등을 받았다. 현지에선 아디스아바바를 줄여 아디스라 부르는데 ‘아디스 레터’는 그곳에서 띄우는 편지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11/24/ONRZS2WGRZGH7IBKNFNDL7LX5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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