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서양인들의 '눈 찢기'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5.12.18. 20:32 업데이트 2025.12.18. 23:21

유럽에서 유대인은 오랜 세월 차별의 대상이었지만 그중에도 대표적인 놀림거리가 그들의 굽은 코였다. 12세기부터 유대인의 코를 실제보다 더 크고 갈고리처럼 희화화한 그림이 등장했다. 과장된 코 그림에 유대인은 욕심 많고 사악하다는 비난을 담았다. 말로도 표현했다. 영어권에서 ‘갈고리 코(hook nose)’라 쓰면 유대인을 비하하는 뉘앙스가 된다.

▶몇 해 전 호주 출장 간 지인이 마트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4~5세로 보이는 아이가 자기를 보더니 ‘옐로 몽키(yellow monkey)’라 하더라는 것이다. 아이 부모가 조금 멋쩍어하는데 그들이 아이 앞에서 평소 어떤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더라고 했다. 미국인이 멕시코 출신 불법 이민자를 ‘젖은 등’(wet back)이라 부르는 것에도 멸시가 담겼다. 두 나라 국경에 놓인 강을 건너느라 몸이 물에 젖는 걸 조롱한 표현이다.

동양인의 작은 눈도 대표적인 놀림감이다. 동양인 고객의 주문을 받는 음식점 점원이 주문서에 ‘눈 찢어진 여자(lady chinky eyes)’라 쓴다. 학자들은 찢어진 틈새를 뜻하는 칭크(chink)가 차이나(China)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단어가 동양인을 비하하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미국 땅에 대거 몰려온 중국인들에 일자리를 빼앗긴 미국인들 사이에 중국인을 향한 적대감이 퍼진 게 배경이란 분석도 있다.

핀란드 미인대회 올해 우승자가 중국인과 식사하고 소셜미디어에 눈을 찢는 모습의 사진을 올렸다. 그러자 최근 반(反)이민 정서에 편승한 일부 정치인이 눈 찢기 사진을 찍어 가세했다. 분노한 아시아인들 사이에 핀란드 국적 항공사 불매 조짐이 일고 핀란드 TV와 일본의 합작 사업이 무산되는 등 파문이 일자 그제서야 핀란드 총리가 사과하고 나섰다. 눈 찢기 파문을 일으킨 여성은 ‘두통 때문에 관자놀이를 누른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미스 핀란드 왕관을 박탈당했다. 그녀의 행동에 가세한 정치인들에 대한 징계 절차도 시작됐다고 한다.

문명 사회라면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신체적 특징을 소재로 삼아 조롱하는 행위를 용납해선 안 된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등 각국 스포츠 리그는 인종 차별 표현을 한 관객의 경기장 출입을 금하고, 선수들에게는 출장 정지와 무거운 벌금을 부과한다. 그들의 눈 찢기 추태를 비난만 할 게 아니다. 우리도 인종 혐오 표현을 예사로 하고 있고, 같은 동양권인 한·중·일도 혐오와 조롱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줘 왔기 때문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12/18/CCQ3MULTSVEKFODMAB5BM5EYJU/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