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5.11 03:01 | 수정 2019.05.14 14:11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지난 주간에는 일본의 새로운 국왕 나루히토(德仁)의 즉위식에 관한 뉴스가 관심을 끌었다. 나 같은 세대의 사람은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했으나 일본 왕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 1964년 11월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기회가 생겨, 상왕의 삼촌이 되는 미카사노미야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왕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인 셈이다. 한국에서 교수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만나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 교수는 왕궁에 머물고 있으나 젊어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군벌을 마땅치 않게 여겨 반대했고, 중동지역 역사를 전공한 학자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한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다. 그리고 일본의 지성인들은 왕실을 존경하면서도 자유로운 국민으로서의 생활이 왕족의 제약된 궁내 생활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퇴위한 상왕의 부인 미치코도 왕비가 되지 않으려고 유학을 빙자해 유럽으로 피신한 일이 있었다. 결국은 왕실의 정중한 요청을 받고 돌아와 왕비가 되었다. 그녀가 왕실에 요청한 조건 중 하나가 '내 아들은(우리의 동궁마마와 같이) 떼어놓지 않고 직접 슬하에서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미치코 왕비는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해 사생활은 희생시킨 셈이다. 그 때문에 많은 국민의 존경을 받고 왕실 최초의 평민 왕비로서 자존심을 유지했다.
이번에 새로 왕비가 된 마사코도 왕실의 요청과 윤허를 받고 왕궁 생활을 시작했으나 궁내 규정의 심한 정신적 억압감 때문에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국민의 동정 어린 위로를 받았다. 딸 하나만을 낳았고 아들이 없어 왕의 동생이 제1차 후계자가 되고 동생 아들이 제2차 후계자가 되어 있다. 결국은 두 평민 여성이 왕비가 됨으로써 자유로운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희생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현실이 국민의 생각을 바꾸어 주었다. 개성과 자유를 중히 여기는 젊은 세대들은 왕실에 대한 국가적 존엄성은 견지하면서도 왕실 안 생활에 대한 동정심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국민 못지않게 국가를 위한 희생을 책임지고 있다는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왕실에 대한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왕실의 일원이 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다.
내가 만난 미카사노미야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교수가 되기는 했으나 마음 놓고 세계 어디에나 여행 가거나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유는 제한되어 있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사상적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일본 왕은 이름은 있으나 성이 없다. 만백성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일왕은 종교적 신앙의 자유도 어렵다. 신도이즘이 국
민 다수의 신앙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교수는 103세까지 살면서 평화주의자의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속죄 의식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교수인 우리에게도 '함께 세계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을 키웠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지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원하는 역사의 길은 다 같다. 자유와 인간애를 갖춘 휴머니즘의 완성이다.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10/20190510021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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