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19.05.09 03:13
한·일 관계 외교적으로 최악, 문학 교류는 어느때보다 활발
국내선 日 소설 베스트셀러… 도쿄 서점, 한국문학 코너 확장
정치 극단 치닫는 것 막으려면 양국 문학 교류 세포처럼 늘려야
일본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茨木 のり子·1926~2006)의 시선집 '여자의 말'을 최근 읽었다. 성혜경 서울여대 일문과 교수가 번역했다. 이바라키 시선집은 이미 여러 차례 우리말로 나왔지만, 성 교수는 이바라키 시인과의 인연을 잊지 못해 새 번역본을 냈다고 한다. 이바라키는 1957년에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발표해 이름을 높였다. 일본 군국주의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 때 청춘을 보낸 것이 억울하고 분했던 시인의 회상이 담겼다. 동시에 전화(戰禍)에 긁힌 공동체의 아픔을 여성의 개인적 언어로 절실하게 그려냈기 때문에 국제적인 반전(反戰)문학이 됐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들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파아란 하늘이 보이곤 했다'라고 시작한 시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다정한 선물을 내게 바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깨끗한 눈빛만을 남긴 채 모두 떠나갔다'며 전쟁에 빼앗긴 낭만의 시절을 아쉬워했다. 이바라키는 한·일 문학 교류에도 앞장섰다. 50세에 한국어를 배워 윤동주를 비롯한 한국 시인들을 번역했고, 그 덕분에 윤동주의 시가 일본의 일부 교과서에 실렸다. 그녀는 시 '이웃 나라 말의 숲'을 통해 '아이(愛) 사랑/ 기라이(きらぃ) 싫어/ 다비비토(旅人) 나그네'라며 한·일 간 애증을 오가는 나그네 심정으로 두 언어를 비교했다. '대사전을 베개 삼아 선잠을 자고 있노라면/ "왜 이리도 늦게 들어왔느냐" 하며/ 윤동주가 부드럽게 꾸짖는다'고 쓰기도 했다.
이바라키의 한글 사랑을 생각하다가 또 다른 일본 여성 시인을 떠올렸다.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우곤 1993년 한글로 시집 '입국'을 낸 시인 사이토 마리코(薺藤眞理子·59). 사이토는 현재 일본에서 한국 문학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그녀가 낸 한글 시집이 절판됐다가 지난해 '단 하나의 눈송이'란 새 제목을 달고 되살아났다. 그녀는 우리말 '눈송이'가 너무 아름다워서 시 '눈보라'를 썼다고 했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라고 노래한 그녀는 "일본어에는 눈송이에 해당하는 고유어가 없다"며 "송이에서 '이응'이 부딪치는 소리가 좋고, 눈이 아닌 눈송이 하나하나의 존재감, 그 하나하나 모든 것을 좋아했다"고 밝혔다. 우리말 '숨결'도 너무 좋아서 언젠가 그 단어로 시를 쓸 생각이라고 한다.
이바라키의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소설가 공선옥의 단편 제목으로 활용됐고, 사이토의 시 '눈보라' 중 시구는 소설가 은희경의 단편 제목으로 차용됐다. 한·일 문학 사이엔 이처럼 잔잔하게 교류가 이뤄져왔다. 요즘 한·일 관계가 외교적으로 최악이라고 하지만, 문학 교류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문학이 소중한 완충 지대 역할을 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일본 소설이 국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한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일 출판 역조(逆調)가 지적되기도 했지만, 한국 독자들에겐 선택의 폭을 넓혔고, 일본 문학의 다양성이 한국 문학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최근 새로운 상황도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 작가 조남주의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출간된 뒤 지금껏 14만 부 넘게 찍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덕분에 한국 문학 번역도 늘어났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10년간 강의한 적이 있는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에게 한·일 관계와 문학의 역할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선, 한·일 문학의 작은 교류를 세포처럼 늘려가는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격년으로 열려온 한·일 기독교 작가 모임을 비롯해 일본 대학과 서점에서 문학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론 윤동주와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을 비교하는 모임이 준비 중이라고 했다. 최근 도쿄의 대형 서점에 갔더니 '82년생 김지영' 인기 이후 한국문학코너
가 20평 규모로 확장돼 놀랐다고 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2012년 일본과 중국 사이에 영토 분쟁이 터지자 양국 정부를 향해 "값싼 술을 마시고 단순 논리를 되풀이하지만 밤이 지나고 남는 것은 두통뿐"이라고 비판했다. 요즘 한·일 정부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일침(一鍼)이라고 본다. 문학은 세상을 단순 논리로 재단하지 않는다.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8/20190508035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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