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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김학의 사건'서도 등장한 '업무수첩'…이번에도 '검찰의 구원투수'?

박현익 기자

입력 2019.04.16 16:46 | 수정 2019.04.16 16:55


수첩, 메모, 일기장.

이런 각종 기록물은 그동안 굵직한 ‘적폐 수사’ 사건에서 검찰의 구원 투수처럼 등장해 ‘스모킹건’(결정적 증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검찰은 피고인이 범행에 관여, 개입했는지를 직접 증명하지 못할 때 간접적으로 범행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통해 유죄를 이끌어냈다. ‘국정농단’ 사건에선 ‘안종범의 업무수첩’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에 대해선 ‘이팔성의 비망록’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시키는 데는 ‘이규진의 업무수첩’이 혐의를 입증하는 핵심 증거가 됐다.

최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재재(再再)수사에 들어간 ‘김학의 사건’에서도 수첩이 등장했다. 당시 수사팀의 중추 역할을 했던 이세민 전 경찰청 수사기획관(경무관)은 지난 14일 검찰 조사를 마치고 나와 기자들에게 "수사기획관으로 근무할 당시 날짜별로 내용을 메모한 것을 토대로 진술했고, 이를 복사해 검찰에 제출했다"면서 ‘2013년’과 ‘경찰청 마크’가 찍힌 수첩을 보여줬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2013년 3월 15일 차관으로 임명됐다. 이 전 기획관 등 경찰 측과 당시 민정수석실 측은 김 전 차관의 비위 의혹을 청와대가 임명 전 알고 있었는가를 두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경찰은 "청와대가 알고 있었지만 민정수석실에서 첩보를 묵살했다"고 했다. 반면 그때 민정수석실에 있었던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과 이중희 변호사는 "경찰이 임명 이후에 보고를 했다"고 맞서고 있다. 또 청와대가 같은 해 3월 중순에 출범한 수사팀의 인사 불이익에 관여했고, 담당자를 불러다 질책하거나 수사 상황을 캐묻는 등 수사 외압을 둘러싼 각종 의혹도 불거져 ‘이세민 업무수첩’이 진실을 밝혀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에 등장했던 각종 기록물은 법정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했을까? 



◇양승태·이명박·고은…수첩·일기장에 발목 잡혀


‘이규진 수첩’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에서 양 전 대법원장을 구속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1월 직권남용 등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법원은 영장을 발부하며 "범죄 혐의 중 상당 부분이 소명됐다"고 했다. 혐의가 소명됐다고 판단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이규진 수첩’이 꼽혔다. 검찰은 작년 8월 압수 수색을 통해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업무수첩 3권을 확보했다. 여기엔 이 전 부장판사가 한자 ‘大(대)’자를 통해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 내용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원은 이를 두고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 개입, 법관 사찰을 하는 데 관여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본 재판을 앞둔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수첩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첩의 증거 능력을 깨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꺼낸 고육책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를 입증하는 데는 일기장이 스모킹건이 됐다. 이 전 대통령이 받는 110억여 원의 뇌물 혐의 중 22억여 원은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이 전 회장 관련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며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이팔성 비망록’을 판단 근거로 들었다. 이 비망록에는 이 전 대통령을 만나 돈을 건넨 경위가 적혀있다. 재판부는 비망록에 기재된 인사 내역이나 직위, 이 전 회장의 출국내역 등이 사실과 부합한 점을 지적하며 "(이 전 대통령 혐의와 관련한) 이팔성 비망록은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형사뿐만 아니라 민사 재판에서도 기록물은 구원투수가 되기도 한다. 고은 시인은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지목한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최 시인은 과거 한 일간지를 통해 "고 시인이 1992~1994년쯤 술집에서 바지 지퍼를 열고 특정 부위를 만져 달라고 했다"며 고 시인의 성추행 흔적을 폭로했다. 최 시인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그가 중3 때부터 쓴 일기장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여기에는 1994년 6월 2일 최 시인이 고 시인에 대한 심경을 쓴 구절이 있었다. 법원은 최 시인의 일기장이 수십 년에 걸쳐 일자별로 기록돼 한 날짜만 허위로 작성했을 가능성이 없다며 최 시인 주장이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수첩은 만능열쇠일까…안종법 수첩은 아직도 논란 중


모든 재판에서 수첩, 일기장 등이 만능열쇠처럼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조작의 흔적이 있다거나, 한쪽짜리 메모로 작성 시점을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둘 사이에 직접적으로 오간 내용이 아닌 다른 이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한 전문(傳聞)증거라면 혐의를 뒷받침할 수 없다. 실제 말을 한 당사자가 법정에 나와 직접 진술하는 등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앞서 국정농단 사건에서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쓴 업무수첩이 증거가 되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안종범 수첩'은 안 전 수석이 2014~2016년 사이 작성한 63권 분량의 업무 수첩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각종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비선(秘線)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각종 불법 청탁을 했다고 의심할 정황이나, 박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대기업 총수와의 독대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추정케 하는 내용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1심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을 간접 증거로 인정해 박 전 대통령 혐의 대부분이 유죄가 맞는다고 판단했다. 이는 공범 혐의를 받는 최씨나 뇌물 공여 혐의를 받는 이 부회장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종범 수첩의 증거 능력은 항소심에 와서 판단이 엇갈렸다.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이 전문증거이기 때문에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봤다. 그러면서 삼성 관련 뇌물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며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을 뒤집고, 이 부회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이 부회장 2심의 결론을 절충한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 범위를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내용'까지로 한정했다. 박 전 대통령이 기업 총수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안 전 수석에게 전해준 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의 신빙성이 증명되지 않았고, 간접증거로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1심, 2심 심급별로나 같은 항소심에서도 각 재판부끼리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린 가운데, 최종 결론은 대법원 손에 달렸다. 대법원은 지난 2월 박 전 대통령, 이 부회장, 최씨의 상고심 재판을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고 밝혔다.


김학의 사건에서도 이 전 기획관이 제출한 수첩은 조작 여부나 날짜 등이 특정되는가를 따지기보다는 전문증거냐 아니냐를 두고 다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전 기획관의 주장과 수첩 내용이 일치한다고 해도 윗선에서 오고간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라면 증거로 인 정되기 힘든 데다 직접 들은 내용을 기록했더라도 말을 한 사람이 맞는다고 확인해주지 않으면 증거 능력이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이 전 기획관의 수첩에 들어있는 내용이 수사의 돌파구가 될 수는 있다"면서도 "하지만 입증하려는 혐의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또다른 증거를 확보하는 게 수사와 재판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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