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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2019 회장님들, 꼰대 탈출 선언

신은진 기자

입력 2019.03.11 03:09


[회장님이 달라졌어요]
황제 리더십? 친구 리더십!


"제가 나와서 놀라셨나요."

지난달 제주도에서 열린 현대차의 신임 과장·책임연구원 세미나에 깜짝 동영상으로 등장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 부회장. 그는 "임직원 여러분이 회사에 대해 걱정이 많으시다는 거 알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한 뒤 "이 위기도 기회로 만드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9월 수석 부회장으로 승진한 그는 현대차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최고경영자(CEO)다. 권위적 기업 문화로 유명한 현대차그룹에서 '그룹 총수'가 임원 세미나도 아니고 신임 과장 세미나에 등장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한 신임 과장은 "회사 생활 10년 가까이 했는데 최고경영자가 소탈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LG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구광모 회장은 분기별로 400명이 모여 개최하던 임원 세미나를 최근 없앴다. 전통적으로 이 자리는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들은 뒤, 그룹 회장이 그룹 경영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분기마다 각 그룹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전파되던 '회장님 말씀'을 없앤 것이다. 대신 월별로 100명 미만이 모이는 포럼 형식으로 바꿔 '실질적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최근 국내 5대 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총수들은 40~60대 초반으로 대폭 젊어졌다〈그래픽 참조〉.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경영 주도권을 쥐게 되자, 그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모습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홍성태 한양대 교수는 "아버지 세대에서는 신비주의·권위주의가 PI(President Identity·최고경영자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조직 구성원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친구 리더십'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근본적 변화 없이 이미지 변신에만 집중한다면 결국 실패한 리더십이 될 수 있다"며 "이미지와 실제 경영이 합치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진정한 변신으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탈·실용주의… "우리 회장님이 달라졌어요"

올 1월 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수원 본사 구내식당에 등장했다. 네트워크 통신 장비 생산 라인 가동식에 참석한 뒤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한 것이다. 손수 식판을 들고 짬뽕을 선택한 그는 직원들의 셀카 요청에도 흔쾌히 응했다. 이 부회장은 해외 출장을 갈 때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고 자기 짐을 직접 들고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그룹 주요 사장단이 공항에서 환송·환영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근 새로운 시도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정의선 수석 부회장이다. 2017년 현대차의 소형 SUV 코나 신차 발표회에서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정 수석 부회장은 최근 임직원 복장 완전 자율화 조치를 취하는 등 현대차그룹 문화의 새 변화를 이끌고 있다. 그는 "앞으로 현대차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ICT(정보통신 기술) 회사보다 더 ICT 회사로 거듭나야 한다"며 조직 문화와 일하는 문화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올 신년회에서 "임직원과 100회 만나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주요 계열사 사업장을 찾아 50~300명의 임직원과 '행복'을 주제로 '토크 콘서트'를 갖고 있다. "미리 준비한 각본은 재미없죠"라며 한 시간 넘게 즉석에서 참석자들에게 질문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등 격식 파괴 만남으로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일정이 빡빡한 그룹 회장이 연중 100회를 채우려면 공휴일, 해외 출장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직원들과 이렇게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임직원들이 회사를 다니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며 "임직원들의 행복을 함께 찾기 위해 힘들더라도 100회 약속을 지키겠다"고 주변에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광모 회장은 그룹 내에서는 '회장님' 대신 '대표'로 불린다. 지난해 6월 취임 직후 임직원들에게 스스로 요청했다. LG그룹 내 회장은 1명이지만 대표는 여러 명이기 때문에 회장의 권위를 내려놓고 전문 경영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4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롯데월드타워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을 찾았다가 롯데지주 직원들과 셀카를 찍었다. 보수적 롯데그룹 문화에서는 '대사건'이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특별한 약속이 없을 경우 구내식당을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별도로 마련된 임원 전용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식사하기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선 신 회장을 마주쳤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황제 페르소나에서 친구 페르소나로… 피로감 등 부작용도

전문가들은 대기업 총수들의 이미지 변신에 대해 "세대·시대 변화에 따라 리더십 역시 바뀌고 있다"며 "이에 발맞춰 CEO 이미지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홍성태 교수는 "과거 CEO들은 '황제 페르소나(외적 인격), 영웅 페르소나'를 선호했으나, 최근에는 '친구 페르소나'가 각광받고 있다"며 "친절한 수평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친구 페르소나'는 CEO 본인은 물론 기업 이미지 개선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지훈 세종대 교수는 "특히 상속받은 경영자 세대는 기업 안팎에서 정당성과 경영 능력에 대해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만큼 직원들 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리더가 되지 않으면 인정받기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이미지 변화가 독(毒)이 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대기업 최고경영진이 언론이나 SNS에 너무 자주 등장하면 피로감이 나타날 수 있고,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부작용도 있는 만큼 성공과 실패 사례를 잘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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