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3.09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내 제자이자 후배 교수이던 S가 전화를 걸어왔다. 동기들 몇이서 점심 초대를 한다는 얘기다. 약속한 식당에 갔더니 같은 연배의 네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웨이터에게 S 교수가 "우리 다섯 사람을 나이 순서대로 서비스해주면 보너스를 주겠다"고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웨이터는 둘러보더니 지팡이를 짚고 들어온 노인에게 먼저, 다음에는 S 교수, 세 번째는 백발이 된 친구, 그러고는 나보다 키는 크지만 얼굴에 주름살이 많은 손님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그 앞에 물잔을 놓았다. 내가 '꼴찌'가 된 것이다. 모두가 웃으며 한마디씩 하고 있는데, 식당 여사장이 들어왔다. 내 옆에 와 인사하면서 "저희 식당에 100세가 되신 손님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모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웨이터는 뜻밖이라는 듯이 내 얼굴을 살폈다.
왜 내가 15년이나 아래인 제자들보다 젊게 보였을까. 친구 김태길 교수가 몇 차례 남긴 말이 있다. "철이 늦게 들어서 오래 살 것"이라는 얘기다. 신과대학에 있던 H 교수는 주변에서 "철이 덜 들었기 때문에 젊어 보이기도 하지만 장수할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했다. 오래전에 내가 "자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으니 며느릿감을 찾아야겠다"고 했더니 즉각 "내 애인도 못 구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엉뚱한 소리를 한 친구다. 그는 나보다 3~4년 아래인데 70대로 보는 이가 많다. 이보다 더한 사건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미국에 있는 내 외손자가 대학에 입학한 첫 여름이었다. 미국 애들은 대학생이 되면 집을 떠나고 방학에도 집에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내 딸은 아들이 보고 싶어 색다른 계획을 세웠다. "여름방학 때 서울 외할아버지가 하와이로 강연하러 오는데 너도 와서 할아버지와 5일 동안 같이 있자"는 부탁이었다. 나도 그러겠다고 합의를 보았다. 한인 교회 강연도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호놀룰루 비행장에 내렸더니 딸과 사위, 손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비행기로 빅 아일랜드라는 섬으로 갔다. 딸과 사위가 먼저 나가고 나는 손주와 함께 뒤따라 걷고 있었다. 환영 나온 교회 사람들이 내 사위에게 가서 인사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다"는 위로의 말이었다. 초청받은 연사는 나인데 내 사위를 나로 착각한 것이다. 내 딸이 당황해서 "이 사람은 제 남편이고 아버님은 저기 오신다"면서 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제야 모두 나에게 와서 다시 인사했다. 그들은 두 번 인사했고 내
사위는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인사를 받았다. 얼굴이 불그레해 가지고 어쩔 줄 몰랐다. 내가 "나 대신 자네가 강연을 하면 되는데, 뭘 미안해하나?"라고 기분을 바꾸어 주었다. 키가 크고 대머리가 된 사위가 강사 같아 보였을 것이다.
나이는 같아도 늙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신체 나이는 어쩔 수 없어도 정신의 젊음을 유지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8/20190308018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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