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문화부장
입력 2019.03.05 03:14
후덕하고 호탕한 우리 부장님 '어머님 리더십' 부르짖지만
외모 골리는 농담과 조롱은 옛날 아재부장님들과 똑같네
페미니즘은 응징, 모멸 아닌 남녀가 서로 존중하는 것
올해 스물여덟, 직장 1년 차 새내기입니다. 대기업은 아니어도, 이 엄혹한 시기에 작지만 튼실한 강소기업에 입사해 만인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비록 말단이지만 다산(茶山)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은 맑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중후하게"를 다짐하며 복사 한 장, 커피 심부름 하나에도 성심을 다하는 중입니다. 한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한 달 전 옮겨 간 새 부서 부장님 때문입니다. 우리 부장님은 안팎으로 존경받는 여성 리더입니다. 후덕한 인상에 화통한 웃음, 장부(丈夫)의 기개마저 지닌 '어머니 리더십'의 전형이랄까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저는 부장님의 하해(河海)와 같은 오지랖,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는 인정미가 공포스럽기만 하니 어찌 하면 좋을까요.
#
"오야~~." 혹시 이런 탄성 들어본 적 있습니까. 제가 일을 하나 처리해낼 때마다 우리 부장님 입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왔다고 해서 "오야~", 커피물을 알맞은 온도로 끓였다고 "오야~", 보고서를 군더더기 없이 만들었다고 또 "오야~" 하십니다. 어디서 들어본 소리라 했더니,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면 맨발로 뛰어나와 외치시던 "오야~ 내 강아지들 왔고나"의 그 "오야~"였습니다. 함께 식사할 때는 더욱 고역입니다. 전생에 여자 공수부대원이었는지, 5분 만에 식판을 게 눈 감추듯 비우는 부장님은 밥 먹는 속도가 유난히 느린 저를 지켜보시며 "깨작깨작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고 앉았구나" "골고루 먹어야 장딴지에 살이 붙지" "사발째 들이켜다 못해 씹어 먹을 기세라야 사내" 같은 말을 중얼거립니다. 한번은 옥상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내려오다 부장님과 마주쳤는데, 코를 킁킁대다 "설마 담배?" 하며 눈을 부릅뜨십니다. 제2사단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대한 건아의 흡연이 뭔 죄인가 싶어 몹시 당혹스러운데, 부장님 낙담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어머님도 알고 계시니?"
#
진짜 공포는 따로 있습니다. 웃음이 넘치는 부서를 만들자며 예고 없이 날리는 농담, 그 속에 박힌 쇠붙이 탓입니다. 우리 팀 패셔니스타인 차 대리님은 "머리랑 옷은 신상인데 얼굴과 뇌(腦)는 빈티지"란 지적을 받고 열흘간 상심했습니다. 영업2팀 에이스 강 과장님은 "제 아무리 명마(名馬)도 살이 찌면 노새보다 못한 법. 그 배로 엘리베이터 타면 참 미안할 거야"라고 저격당한 뒤 한 달째 계단으로 출퇴근하십니다. 신문에 여성 혐오 사건이 보도된 날이면 유머는 폭탄으로 발화합니다. "저런 종자들은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매달아 태평양 바다에 처박아야 해, 그렇지?" 하며 주먹을 불끈 쥐실 땐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요. 한 선배가 충고했습니다. 우리 부서에서 출세하려면 영업력보다 젠더 감수성이 높아야 하고, 가부장(家父長)은 금기어이며, 여자 선배들 주재하는 밥 자리에 절대 빠져선 안 된다고. 바로 그 밥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남편? 망치로 뒤통수를 톡 때리고 싶지. 누가 안 보면 만9900원에 내다 팔고 싶지." 그날 처음 '결혼은 미친 짓'이란 말을 실감했습니다.
#
젠더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 영화 '더 페이버릿'을 보았습니다. 남녀의 권력 관계를 거꾸로 뒤집은 영화입니다. 권력은 여왕을 비롯한 세 여인에게 있고, 남자 귀족들은 뽀글 머리 가발에 하이힐, 프릴 잔뜩 달린 옷을 입고 '오리 달리기' 시합에만 열을 올립니다. 사랑을 구걸하다 "내가 중요한 걸 생각할 땐 좀 잠자코 있어!"라는 핀잔을 듣는 젊은 백작은 어찌나 한심한지요. 역사의 모든 시기에 멸시받고 살아온 여성들을 생각하면 영화의 극단적 풍자가, 오늘의 남성 괄세가, 부장님 옹골찬 독설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이를 위한 해법이 반드시 응징이어야 할까 의문을 품게 됩니다. 영화에서처럼 여성이 권력을 쥐어도 광기와 부패의 온상이 되는 걸 보면 젠더 감수성만큼 중요한 건 개개인의 인격이 아닐까요. 용서와 양보 없이 증오와 악다구니만 무성하다면 페미니즘이 마초이즘과 다를 게 무엇일까요. 제가 아는 페미니즘은
남녀가 더불어 행복해지는 것이지 모멸감을 주자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왜 부장님한테 "그 나무젓가락 같은 다리로 공을 어떻게 차니?"라는 끌탕을 들어야 할까요.
#
지엄하신 부장님께 감히 항변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런 통보를 들었을 뿐입니다. "아마추어 작가인 내가 곧 콩트를 발표하리니, 거기 귀하로 의심되는 등장인물이 나와도 놀라지 말라. 괘념치 말라."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4/2019030403475.html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튼, 주말] 웨이터에게 "외모만 보고 나이순으로 서비스해봐라" 했더니… (0) | 2019.03.09 |
---|---|
[유현준의 도시이야기] '일상이 숨 쉬는' 광화문 광장 만들려면… 상점과 벤치, 나무 그늘 (0) | 2019.03.07 |
[아무튼, 주말] 북녘 고향 떠나 70년… 마음의 고향 양구에 안식하리라 (0) | 2019.03.02 |
[東語西話] 안동의 종가에서 우리 집안 옛어른을 만나다 (0) | 2019.02.28 |
[김철중의 생로병사] 도쿄서 지내보니… 고령 사회는 개성대로 살아볼 기회 (0) | 2019.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