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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東語西話] 안동의 종가에서 우리 집안 옛어른을 만나다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19.02.28 03:11


임진란 때 의병 모으며 결기를 촉석루에 로 남긴 학봉 김성일
에 등장하는 내 어른 함자를 남의 종택에서 듣고 장탄식

안동 지역의 종가 순례 마지막 목적지는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 종택이다. 대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른의 모습이 버스 차창 너머로 설핏 보인다. 한복 두루마기 정장 차림이 주는 무게감에는 종손의 포스가 그대로 드러난다. 중후한 모습과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가풍의 한 자락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전국 종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가보를 소장하고 있다는 말씀 속에는 후손으로서 자부심이 가득하다. 학봉 종손은 도지사에 버금가는 의전(儀典)이 뒤따랐다고 할 만큼 지역사회에서 의성 김씨 가세는 만만찮다. 당신 역시 사당에 오를 때는 마당에서 신발을 벗고 버선발로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는 최상의 예의를 갖추었다.

학봉 선생을 상징하는 한마디는 '올곧음'이다. 원칙주의 앞에는 누구건 어떤 경우건 예외가 없었다. 설사 임금 앞이라고 할지라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전상호(殿上虎·대궐의 호랑이)다. 동시에 의례에도 밝았다. 일본 정세를 살피러 갔을 때도 조선 의례라는 원칙에 충실했다. "간파쿠(關伯·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칭)는 왕이 아니므로 뜰에서 큰절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했고 기타 의전에도 절차와 원칙에 지나치게 집착했다고 전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통역관인 요시라(要時羅)는 "김성일은 절의(節義) 때문에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의) 형세를 두루 살피지 않았다"고 평할 정도였다.

그런 허물에도 불구하고 늘 백성 편에서 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민심을 모으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임시직책인 초유사(超諭使)로 임명된 것도 (정치적 이유를 제외하면) 그 바탕에는 민심의 지지라는 그가 가진 무형의 자산 때문이다. 진주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 안은 텅 빈 상태였다. 의기투합한 인근 지역의 군수와 현감 2인마저 이런 현실 앞에서 "남강으로 몸을 던지자"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으로 싸우자"고 달랬다. 그 인연으로 세인들은 '영남의 삼장사(三壯士)'로 불렀다. 학봉 선생은 그때 심경을 시(詩)로 남겼다. 뒷날 천파 오숙(天波 吳䎘·1592~1634)은 이 글을 현판에 새겨 촉석루에 달았다.



촉석루 위에 마주앉은 세장사(矗石樓中三壯士)

한잔 술에 비장한 웃음으로 남강물에 맹세하네(一杯笑指長江水)

강물이 쉬지 않고 영원히 도도하게 흘러가듯(長江萬古流滔滔)

저 강물 마르지 않는 한 우리의 넋도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그 시가 학봉 종택 유물관 입구에 걸려 있다. 세장사는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1537~1597), 송암 이노(松巖 李魯·1544~1598·임진란 기록 '용사일기(龍蛇日記)' 저자)라는 친절한 해설까지 달아 놓았다. '대소헌 선생' 이란 이름이 종손의 입으로 소개될 때 나도 모르게 장탄식이 나왔다. 남의 종택에 와서 나의 뿌리가 되는 어른 함자를 만난 까닭이다. 남을 잘 웃기고 스스로도 늘 웃었기 때문에 자호를 대소헌이라고 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도 농담은 빠지지 않았다. 당신이 한번 웃기면 의병장들의 무섭고 굳은 얼굴도 부드럽게 바뀌었다. 정치적 오해로 인하여 잠시 옥에 갇혔을 때도 옥졸들과 웃고 농담을 즐기는지라 모두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까지 망각할 정도였다. 사실 비장한 상황일수록 웃음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진주 촉서루로 3인이 처음 갔을 때도 '한잔 술에 웃음(一杯笑)'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제 속가의 성씨로 살았던 시간보다는 불가의 석씨(釋氏)로 산 기간이 더 많은지라 어느새 가물가물한 성함이기도 하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올 무렵 승려의 성이란 출신지를 의미했다. 축법란 지루가참 안세고 강승회 등은 인도말과 중국어에 능통했고 역경가로 이름을 떨쳤다. 축(竺·인도)씨, 지(支·대월지국)씨, 안(安·안식국)씨, 강(康·강거국)씨 등 다양했다. 천축국(인도)을 제외하면 대부분 실크로드 주변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 국가들이다. 유가식으로 표현하면 본관(本貫)인 셈이다. 동진(東晉)의 도안(道安·312~384) 대사는 성씨를 지역이 아니라 법맥(法脈)을 의미하는 석씨(釋氏·석가모니 집안)로 바꾸어야 한다는 원칙론을 확립했다. 드디어 동아시아에 '카필라(석가모니 탄생지) 석씨'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중국·한국·일본을 망라하는 글로벌 성씨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며칠 전 대구 비슬산 자락에 머물고 있는 스님한테 전화가 왔다. 대뜸 성씨를 묻는다. 항렬까지 물었다. 자기가 아저씨뻘 되니 앞으로 예우를 잘하라는 농반진반 말까지 덧붙인다. 화수회(花樹會·종친 모임)에 참석했더니 필자의 근황까지 묻는 이가 있더라고 하면서.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33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