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근
입력 2019.01.01 03:01
희곡 당선작
등장인물 학생1, 학생2, 강사, 출제자, Man, Woman
무대 구성 극이 시작할 때 무대 아래 왼쪽에는 쉽게 옮길만한 소형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극 중 배우들이 책상과 의자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옮겨가며 연기할 수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30㎝ 높이의 강단이 넓게 퍼져 있어 극 중 배우들이 강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연기할 수 있다.
1장
조명이 켜지고 아무도 없는 무대가 드러나는 동시에 영어 듣기 도입부 음악이 무대를 장악한다. 도입부 음악은 대한민국의 영어 듣기 시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이다. 학생1과 2, 무대 앞에서 등장한다. 두 사람, 수상한 사람이라도 따라오는 듯 관객 쪽을 유심히 살피며 책상과 의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도입부 음악이 더욱 커지고, 학생1과 2, 의자에 앉아 서로 대화를 시작한다. 둘의 대화는 관객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학생1은 대화를 하고 싶지만 학생2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도입부 음악이 잠잠해질 무렵, 영어 듣기 지시사항이 울려 퍼진다. 지시사항은 녹음된 음향을 튼다. 극에서 나오는 영어 대사는 자막으로 번역을 내보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시사항 지금부터 영어 듣기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문장을 듣고 그에 알맞은 행동을 고르는 문항입니다. 지금부터 들려주는 문장과 대화는 한 번씩만 들려주니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Instruction Listening comprehension test. In this part of the test, you will hear various sentences and conversations. Choose the right action that properly matches each corresponding sentence. The sentences and conversations will be played only one time.
(번역
지시사항 듣기 평가. 이 영역에서는 다양한 문장과 대화를 들려줍니다. 각 문장에 따라 알맞은 행동을 고르기 바랍니다. 문장과 대화는 한 번만 들려줍니다.)
학생1 (지시사항이 끝나는 동시에 벌떡 일어서서)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다.
학생2 뭐?
학생1 남자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학생2 뭐라는 거야?
학생1 남자가 타인에게 질문하고 있다.
학생2 그만 해라.
학생1 (꿋꿋이) 남자가 남자를 다그치고 있다.
학생2 그만 하라니까!
학생1 남자가 남자에게 소리치고 있다.
학생2 그만하라고오!!!!
학생1 (더 맞서며) 남자가 남자에게 고함치고 있다! (사이. 학생2,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든다.)
학생1 남자가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든다. (학생2, 다시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려 한다.) 남자가 가방에서. (학생2, 학생1을 놀리듯 가방에서 손을 꺼내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아니 바지에서. (다시 가방으로) 가방. (다시 바지로) 바지. (다시 가방으로) 아니 또 가방에서. (몇 번 반복되다가) 젠장.
학생2 (위풍당당하게) 이제 됐지? (학생2, 정면을 바라본다. 기다리는 학생1. 학생2, 불현듯 학생1을 쳐다본다.) 뭔데?
학생1 마저 하려던 걸 해야지.
학생2 내가 필요한 건 다 했는데?
학생1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고, 그다음.
학생2 (정면을 바라보며) 정면을 바라본다.
학생1 아니지! 공책을 왜 꺼냈는데?
학생2 공책을 꺼낸 이유는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어서 공책을 꺼낸 거겠지.
학생1 그렇다면?
학생2 공책이 필요하겠지.
학생1 아니지!
학생2 지금 공책이 필요 없다는 거야?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은데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이려면 공책이 없어도 된다는 거야?
학생1 그게 아니라!
학생2 빙빙 둘러대지 말고 똑바로 말해.
학생1 공책을 꺼냈으면. 공책을 꺼냈으면 당연히 펜을 꺼냈어야.
학생2 (말을 자르며) 펜! 연필! 볼펜!
학생1 공책을 꺼내놓고 펜을 꺼내지 않는 그 무식함이란!
학생2 공책을 꺼내놓고 펜은 안 꺼낼 수도 있지.
학생1 둘은 동전의 양면이야. 바늘과 실이고. 악기와 연주자. 컴퓨터 키보드와 손가락. TV 화면과 눈알. 도화지와 붓, 무대와 관객. 이야기와 독자. 인생과 인간.
학생2 (끼어들며) 공책은 공책이고 펜은 펜이지.
학생1 펜 없이 공책만 꺼내서 무엇을 할 수 있는데?
학생2 왜 그렇게 공책을 꺼내는 것과 펜을 꺼내는 것에 집착하는데?
학생1 나는! 나는! (다시 한번 음악이 크게 흐르고, 둘의 대화는 관객에게 들리지 않은 채로 이어진다. 학생1, 흥분한 상태로 과장된 몸짓을 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여기서 음악은 대한민국 인터넷 강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도입부 음악이다. 말끔한 옷차림을 한 강사가 등장한다. 극을 통틀어 강사는 다른 인물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강사 안녕하세요. 여러분.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오늘도 야심 차게 이 한 몸바쳐 여러분에게 특별난 강의 선사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전국에 계신 우리 수강생 여러분들, 저 화면발 좀 받나요? 오늘 평소와 다르게 옷 좀 차려입고 왔는데. 아, 참 그리고 현장까지 이렇게 지친 몸 이끌고 손수 공부하러 온 (관객을 바라보며) 우리 “현강생”들도 정말 수고 많아요. 아까 여러분들 문 앞에서 줄 서 있는 모습 위에서 아주 인상 깊게 지켜봤어요. (웃음) 알아요, 실물이 더 낫죠? (강단에 올라간다. 우수에 찬 눈빛으로) 여러분 그동안 시험 보느라 고생 많았어요. 정말 상투적인 말이지만 여러분이 시험장에서 보여준 여러분의 피와 땀과 투지가 제 오염된 영혼을 조금이나마 정화해주었답니다. 여러분의 연필이 시험지 위에서 사그작사그작 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인생의 빈 공간이 다시 한번 꽉 차오르는 것만 같았어요. (비장한 눈빛으로) 하지만 여러분, 이미 지나간 과거는 지나간 과거라지만, 지나간 시험은 지나간 시험이 아니라는 거 여러분 많이들 아시죠? 늘 언제나 복습, 복습, 복습, 재확인, 재확인, 재확인! 다들 정신 차리고 집중하세요! (학생1과 2, 대화를 멈추고 앞을 바라본다.) 시험 문항이라는 게, 참 떠나간 옛 연인과도 같아요. 헤어지는 순간에는 두 번 다시 내 인생에서 볼 것 같지도 않더니 막상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어떤 형태로든 나한테 찾아오는 게. 맞아요. 인간관계도 일종의 시험이에요. 인간관계에는 과거란 없어요. 만나면 만나는 관계, 헤어졌으면 헤어진 관계, 다시 만나면 다시 만나는 관계. 관계란 건. 우리가 정의 내리는 순간 ing 현재 진행형이 된답니다. (강단에서 내려와 다시 무대 앞쪽으로 온다.) 그러니깐 이제 시험이 끝났다고 시험이 끝난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여러분이 본 시험은 어떻게든 여러분을 다시 찾아온답니다. 그러니, 우리 화이팅하고 다시 한번 복습, 복습, 복습, 재확인, 재확인, 재확인! 하는 시간을 가져요. 하, 서론이 무지무지 길었네요.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생각이 갑자기 많아져서, 아, 이제 그만! 수업할게요. 먼저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논란이 뜨거웠던 문항은 11번 문항이었어요. 11번 문항은 남자, 여자, 두 사람이 서로 여섯 차례 대화를 주고받는 유형이죠. 교육 현장에 인생의 절반을 넘게 바친 한 사람으로서, 이 대화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우선 같이 들어는 보도록 해요. (조명 어두워지며 영어 듣기 도입부 음악이 희미하게 들리다가 점점 커진다.) 저는 잠시 빠져 있을 테니, (Man과 Woman, 옆으로 등장해 강단에 무심한 듯 걸터앉는다. Man과 Woman은 영어 모국어 화자가 연기한다.) 쉬잇, 대화를 먼저 들어보고 (강사, 학생1과 2를 끌고 무대 앞쪽으로 데려온다.) 여러분이 무엇을 놓쳤는지 먼저 스스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아요. 그러면 대화, 틀어주세요! (강사, 유유자적하게 퇴장한다. Man과 Woman, 다음의 대화 도중 서로를 절대 쳐다보지 않는다. 학생1,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본다.)
Man For this part, you will hear conversations. The conversations are not printed in your test paper and played several times. Listen to the conversation and answer the corresponding question. Number 11.
Man What a lovely day to be outside!
Woman Yes, it is so breezy and warm.
Man I’m so sorry we have to work in this perfect day.
Woman Tell me about it. I’m so dreading this life.
Man Haha Oops, it’s already 12:50. We gotta head back to our place.
Woman Alright. Well, do you happen to know where the restroom is around here?
(번역
남자 이번 영역에서는, 대화를 들려줍니다. 대화는 시험지에 적혀 있지 않고 여러 번 들려줍니다. 대화를 듣고 질문에 답하기 바랍니다. 11번.
남자 정말 밖에 있기 좋은 날씨네요!
여자 맞아요, 산들바람이 불고 따뜻하네요.
남자 이렇게 완벽한 날에 일해야 한다니 참 유감이네요.
여자 말도 마요. 이 인생이 싫어지려 그러네요.
남자 하하 이런, 벌써 12시 50분이네요. 우리 장소로 돌아가야겠어요.
여자 그래요. 근데, 여기 근처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혹시 아시나요?)
무대 조명 밝아진다. Man, 위풍당당하게 학생1과 2 사이를 지나가며 퇴장. Woman, 두 사람을 무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퇴장. 학생1, Man이 있던 곳에서 부산스럽게 돌아다닌다.
학생1 여섯 번 주고받고, 끝나고, 여섯 번 주고받고, 끝나고. 벌써 몇 번째지?
학생2 하나 일, 두 이, 석 삼, 넉 사, 다섯 오, 여섯 육. 관심 없어.
학생1 딱 여섯 번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여섯 번. 남자가 말을 시작해서 여자가 말을 끝내고. 남자가 대화를 시작해서 여자가 대화를 끝내고….
학생2 테니스 칠 때랑 비슷하네.
학생1 테니스?
학생2 내가 서브를 넣는 차례에서 점수를 따 본 적이 없어.
학생1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학생2 내가 서브를 하면, 상대방이 항상 마지막에 점수를 딴다고.
학생1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학생2 (답답해하며) 네가 좀 전에 남자가 말을 시작하면 무조건 여자가 말을 끝낸다며. 서브를 말을 시작하는 것에 빗대면. 아 됐다, 그만하자. (사이.)
학생1 주고받는 대화를 지금 테니스 랠리에 비유한 거구나, 그치? (테니스 스윙 시늉하며)
학생2 이번에는 이상하게 어느 정도 알아먹네? (받아치며)
학생1 (다시 받고) 평소에는 알아먹지 못했다는 뜻이야?
학생2 비유가 비 내리는 유람선의 줄임말이라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또 받아친다.)
학생1 내 마음은 강이요, 시간은 금이로다. 이렇게 비유랍시고 돌아 돌아 얘기하는 게 나는 무지 (받으며) 답답하거든.
학생2 (마지막 단판 스윙) 무지 답답한 게 아니라 답답 무지한 게 아닐까?
학생1 (관객을 바라보며) 왜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면 될 걸 비유를 한다며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여기저기 꼬아 대는 거야? 가시밭길 같은 내 인생? 장미처럼 매혹적인 그대? 그렇게 둘러대다가 자기가 맨 처음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까먹고 자기 의견, 감정,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정말로 하고 싶은지 전달도 못 하고. 꽈배기처럼 매번 배배 꼬아대니. (깨달으며) 이런.
학생2 왜?
학생1 아니야.
학생2 꽈배기?
학생1 뭐?
학생2 처럼?
학생1 응?
학생2 꽈배기처럼?
학생1 고마워.
학생2 뭐가?
학생1 비유는 돌려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학생2 사람들이 꽈배기처럼 말을 비비 꼰다고 말하는 게 돌려 말하는 게 아니야?
학생1 돌려 말하는 건 아니지. 말을 비비 꼰다고 직접 말은 했잖아?
학생2 그런데 꽈배기는 왜 갖다 썼지?
학생1 말을 비비 꼰다고만 말하면 심심하잖아? 그래서 “꽈배기처럼”을 넣은 거지. 꽈배기가 이리저리 꼬인 모습을 떠올리면 내 말의 의미가 더 잘 들어 먹히니까.
학생2 아까는 비유가 돌려 말하기라며?
학생1 말했잖아. 비유가 돌려 말하기가 아니란 걸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고. (사이. 학생2, 의심의 눈초리로 학생1을 쳐다본다. 학생1, 차마 못 견디고) 내가 말하려는 돌려 말하기는 바로 이런 거야. 자기 할 말을 곧이곧대로 똑바로 전달하지 않고 다른 길로 새는 그런 비효율적인 언어 사용의 극치. (학생2를 자기 쪽으로 격하게 끌어당기며) 그건 마치 들판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어린 사자가 자세를 이렇게 낮추고 어슬렁어슬렁 먹잇감을 향해 걸어가는데, 문득 반대쪽 건너편에 이상한 그림자 형상이 보이는 거야. 사막의 때아닌 칼바람에 앞뒤로 좌우로 갈피를 못 잡고 흔들흔들 출렁출렁 대는 그 신비스러운 그림자. 그 신비스러운 그림자에 마음이 단단히 홀려버린 어린 사자는 (무대를 가로지르며 강단으로 올라간다.) 호기심에 거기로 냅다 달려가 버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신비스러운 그림자는 평소에 자기가 낮잠 자던 볼품 없고 따분한 바위일 뿐이었던 거지. 그런데 이 어리숙한 사자는 먹잇감이 저 발치에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자기가 사냥 중이었다는 것도 까먹어 버리고 그 바위 위에서 그냥 낮잠이나 자 버려. 자기가 이틀 동안 쫄쫄 굶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이야.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학생2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어린 사자는 멍청하다, 이거야?
학생1 (정신이 든다.) 내가 처음에 하려던 말이 뭐였지?
학생2 (무대 앞으로 나오며) 내가 처음에 하려던 말이 뭐였지?
학생1 뭐가?
학생2 내가 왜 테니스를 언급했지?
학생1 (깨달은 듯) 아 참!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테니스 경기에 빗댄 건 (테니스 스윙) 정말 훌륭한 비유였어.
학생2 (받아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했어야 했는데.
학생1 뭐가?
학생2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니깐 “단식” 테니스 경기라고 말해야 했어.
학생1 그럴 필요까지야.
학생2 돌려 말하는 건 싫다며?
학생1 테니스, 대화, 서로 주고받는다, 완벽한 착착 쿵 한 쌍의 비유인데?
학생2 만약에 어떤 사람이 테니스를 듣고 나서 복식 경기를 떠올렸으면? 그럼 네 명의 사람이 대화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거 아냐. 그건 명백한 돌려 말하기야.
학생1 그건 돌려 말하기가 아니야. (사이.) 그건 그냥. 오해야.
학생2 돌려 말하기가 원래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빙빙 둘러대다 다른 소리를 하게 되는 거라며? 그럼 그건 돌려 말하기지.
학생1 생각났다!
학생2 뭐?
학생1 내가 말하려던 거.
학생2 뭔데?
학생1 정말 이상한 테니스 경기.
학생2 테니스 경기?
학생1 “단식” 테니스 경기.
학생2 두 사람이 하는?
학생1 규칙이 정말 이상했어.
학생2 예를 들어?
학생1 서브를 넣는 사람이 무조건 점수를 내어주는 규칙이었지.
학생2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규칙이야.
학생1 더 이상한 건 꼭 여섯 번만 친다는 거야.
학생2 주고받고 여섯 번?
학생1 혼성 경기였지 아마.
학생2 한 번 볼 수 있을까?
학생1 참여도 해볼 수 있을걸.
학생2 그냥 관람만 해보고 싶은데. (조명 어두워지며 영어 듣기 평가 음악이 울려 퍼진다. Man 등장. 무대 앞으로 유유히 걸어 나와 의자에 앉는다. 정면을 응시한 채 얼굴 하나 까딱 않는다. 학생1과 2, 강단 위로 올라가 대화를 엿본다. Woman은 무대 밖에 위치하여 마치 Man이 혼자 대화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학생1 저 사람이야!
학생2 그 이상한 테니스를 한다는?
학생1 여섯 번이야. 여섯 번.
Woman(무대 밖) Number 11.
Man What a lovely day to be outside!
Woman(무대 밖) Yes, it is so breezy and warm.
Man I’m so sorry we have to work in this perfect day.
Woman(무대 밖) Tell me about it. I’m so dreading this life.
Man Haha Oops, it’s already 12:50. We gotta head back to our place.
Woman(무대 밖) Alright. (말하고 있는 도중 Man 퇴장) Well, do you happen to know where the restroom is around here? (조명 다시 밝아진다.)
학생2 정말 여섯 번이었어.
학생1 정말 딱 여섯 번이었네.
학생2 근데 누구랑 경기를 하고 있던 거지?
학생1 경기?
학생2 분명히 경기를 하려면 두 사람 이상은 있어야 한단 말이야.
학생1 그런데도 공은 움직였지.
학생2 이건 두 사람이 경기하는 게 아니라 꼭 1인 스쿼시를 하는 기분이었어.
학생1 테니스도 스쿼시도 모두 참 적절한 비유야.
학생2 이런. 세상에. (상실감에 주저앉는다.) 이건 재앙이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학생1. 학생2, 다시 일어나서 무대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사이.) 인간은 흰색도 검은색이라고 둔갑해버릴 수 있는 악랄한 거짓말쟁이야.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만물상도 어느 순간 늙은이의 빈 수레라고 빗대어 버리는 파렴치한 종족이야. 아아 시인은 타고난 도적! 아아 시인은 타고난 도적! 처음엔 테니스, 그러다가는 “단식” 테니스, 이제는 1인 스쿼시. 실체를 가리려고 면상을 다채롭게 바꿔대는구나. 이 가면극의 은둔자!
학생1 이성을 상실했군.
학생2 남성은 여성에게 이성, 여성은 남성에게 이성.
학생1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학생2 분명 누군가와 대화했단 말이야.
학생1 제정신은 아니야.
학생2 제멋대로 뱉어내는 대화는 아니었어.
학생1 제발.
학생2 제시간에는 끝났단 말이야.
학생1 제기랄! (학생2, 가방이 있는 쪽으로 달려간다.) 이제는 또 뭘 하려는 수작이지?
학생2 재장전 (부산스럽게 가방을 뒤진다.)
학생1 재장전?
학생2 생각의 재장전.
학생1 제멋대로 말을 내뱉는군. (학생2, 가방에서 펜을 꺼낸다. 학생1, 흥분해서) 남자가 드디어 가방에서 펜을 꺼낸다! 남자가. 잠깐, 펜은 꺼내서 뭐 하려고?
학생2 재생산
학생1 생각의 재생산?
학생2 방금 본 경기를 이 하얀 도화지에 옮기는 거야.
학생1 고스란히?
학생2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학생2,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기 시작한다.)
학생1 무엇 때문에?
학생2 분석을 위해.
학생1 그다음에는?
학생2 제기랄!
학생1 뭐가?
학생2 기억이 잘 나질 않아. 젠장, 젠장, 젠장!
학생1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학생2 무엇을 하고 있었어.
학생1 테니스 경기를 하고 있었어!
학생2 테니스 경기?
학생1 나 홀로 테니스 경기!
학생2 (분노에 차서) 테니스, 테니스, 테니스, 테테테테테니스! (학생1, 당황한다.) 테니스 경기는 이제 집어치워! (무대 반대편으로 간다.) 방금 저 남자가 했던 건 테니스 경기도, “단식” 테니스 경기도, 1인 스쿼시도 다 아니야. 저 남자가 했던 건 그냥 대화였어, 대화였다고! 공을 주고받니 마니는 다 집어치워. 저 남자가 건넨 건 저 남자의 머릿속으로부터 나온 말소리였어! 말소리!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나오는 말소리였다고!
학생1 말을 건네고 있었다는 거야 말소리를 건네고 있었다는 거야?
학생2 우리가 테니스니 스쿼시니 떠드는 동안 어린 사자가 되어버린 거야.
학생1 (드라마틱하게) 먹잇감을 까맣게 잊어버린 어린 사자!
학생2 (분노한다.) 어린 사자! 어린 사자도 집어치워! 어린 사자마저도 비유란 말이야. 그래, 어린 사자마저도 비유란 말이야!
학생1 (절박하게) 우린 비유의 죄수야. 비유의 사슬에 꽁꽁 묶여 버린 수감자.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진 사막의 어린 은둔자. 목이 말라 헥헥거리며 오아시스를 갈망하는 눈동자. (Woman, 무대로 등장한다.) 저기 보이는 거짓 그림자를 보려고 낮잠을 자고 마는 어린 사자! (Woman을 발견하고 놀란다.)
학생2 자기 연민, 자기 위로, 자만심, 자부심, 자존심… 본질을 말하란 말이야. 핵심을 말하란 말이야. 한낱 나무의 이파리가 뿌리를 대변할 수는 없어. 직유. 은유. 풍유. 활유. 원관념. 보조관념! 다 집어치워 버려! 대유, 환유, 제유, 의성어, 의태어. 다 집어치워 버려! (취한 듯 몸을 비틀거린다. Woman, 무대 뒤쪽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서성인다.)
학생1 (점점 다가오는 Woman을 보며) 그림자가 점점 커지고 있어! 점점 커지고 있어! 분명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그림자가 점점 커지고 있어! 이런… 저길 봐! (학생2를 격하게 돌려세운다.)
학생2 무덥고 정열에 넘치는 나의 돌님 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태어난 지 1년이 되면 돌날 머리카락을 이렇게 돌돌 말면 돌대가리.
학생1 (절제된 비명에 가깝게) 일어나 제발!
학생2 무슨 일이야?
학생1 저길 봐!
학생2 사막의 그림자!
학생1 저 여자가 뭘 하는 거지? (사이.)
학생2 가서 말을 걸어야겠어.
학생1 말을 걸겠다고?
학생2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볼 거야.
학생1 이런! (학생2, Woman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Woman, 학생2를 발견하자 신기한 듯 살펴보다가 말을 건넨다.)
Woman Well, do you happen to know where the restroom is around here? (학생2, 곧바로 얼어버린다.)
학생2 어. 어.
학생1 어서 돌아와!
학생2 어. 어.
학생1 빨리 돌아와!
학생2 어. 어.
Woman (더 천천히) Do YOU happen to know where the restroom is around here? (학생2,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누워버린다. 암전.)
2장
조명이 밝아진다. 학생1과 2, 넋이 나간 채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있다. Man과 Woman, 강단에 동상처럼 걸터앉아있다. 잠시 후 인터넷 강의 음악이 흐르면서 무대 밖에서 강사의 외침이 들린다.
강사 (무대 밖) 때애애애애애애앵!!! 스따아아아아아아압!!! (강사 등장.) 여러분, 딴 짓 하면 곤란합니다, 들려주는 대화에만 집중해주세요. 들려주는 대화에만. 왜 이렇게 흥분해 있어요? 흥분하면 집중을 할 수 없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다른 생각 하다가는 대화를 놓치기 십상이에요. 대화를 놓치면 문제를 풀 수 없죠? 문제를 풀 수 없으면 여러분의 피와 땀을 담은 그동안의 노력이 다 허사가 되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지나간 시험은 지나간 시험이 아니라는 거. 제가 오늘따라 저엉말 쓴소리가 많아졌네요. 여러분 때문에 그런 건지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왜 이렇게 멜랑꼴리한지. (관객 쪽을 보며) 거기 학생 지금 졸고 있는 건가요? (학생1과 2,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아무튼 방금 대화는 잘들 들으셨길 바라요. 여러분 대화문을 들을 때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땀 한 땀 아주 잘 아로새겨 들어야 해요. 대화문 유형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어하는 유형이에요. 대화문은. 다른 유형과는 달라요. 무언가 주고받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오고 가는 다이나믹함이 있어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저는 항상 대화를 테니스에 비유하곤 한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우리가 건네는 말을 테니스공이라고 생각해 봐요. (테니스하는 시늉을 하면서) 내가 말을 건네면, 상대방이 말을 다시 건네고, 상대방이 말을 건네면 내가 다시 말을 건네고, 왔다 갔다, 요리조리, 이리저리, 갈팡질팡, 치고받고, 제 비유가 이해가 가시나요? 어머, (고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나 문학 공부나 좀 더 해볼 걸 그랬나 봐. 대화 유형을 테니스에 비유한 사람은 아마 제가 처음일 듯싶은데.
학생1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거짓말!!!!!!!!!!!!!! (학생1, 다시 앉는다. 학생1과 2, 들리지 않는 대화를 계속한다.)
강사 어때요, 그렇죠? 어머 여러분, 제 말에 반응 좀 해주세요. (관객의 대답을 유도한다.) 현강생분들, 그리고 전국에 강의를 신청하고 계신 수강생분들, 그렇죠? 소리가 작네요. 그렇죠, 여러분? 에너지를 느껴봐요. 대화에는 크든 작든 에너지가 흘러요. 에너지가. 내가 반응하는 만큼 상대방도 반응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강하게 스매시를 한 방 때리면! 저 또한 온몸을 던져 공을 막아내는 수밖에는 없죠! 여러분 혼자 대화하지는 않잖아요? (사이.) 그럴 수도 있으려나? 제가 이렇게 혼자 떠들고 있어도 우리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나 여러분이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다 들려. 내가 말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한소리씩하고 있잖아. (웃음. 잠시 우수에 잠긴다.) 어머, 이야기가 또 다른 길로 새버렸네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건지. 정말 강사로서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있는 점, 거듭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수가 없네요. (Man과 Woman을 끌고 무대 오른쪽으로 옮긴다.) 그래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번 대화문이 시험을 친 수험자 여러분들 사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대화문이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흠. (강사, 강단에 올라선다. Man과 Woman을 분석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보며)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무책임한 발언은 강사로서 하면 안 되는 거지만, 제가 추측하건대 여러분들이 그냥 집중을 안 한 거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토닥이는 말투로) 왜 그러셨어요, 이렇게 거저 던져주는 문제는 거저 받아먹으셨어야죠! 대화 속에서 정말 별다른 상황은 제시된 게 없는데. 어머, 나 왠지 여러분이 어려워했던 이유를 알 거 같아. 대화문이 저엉말 너어무 심심해서 그랬나 봐. 왜, 우리 영화나 소설 같은 거 보면 좀 고저가 있어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재미도 느끼고 스릴도 느끼고 그러잖아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근데 11번 대화문은, 정말, 유우우우우우난히 재미가 없었네요. (자기의 깨달음에 자기가 감탄하며) 어머, 정말 그랬나 보다. 대화가 너무 별거 없이 단조로워서 여러분이 어려웠나 보다. 참 안타까워요, 여러분. 이 대화문이 그래도 우리 실생활에 가장 가까운 대화였는데. 안 그래요? 가장 최근에 남들이랑 나눈 대화를 떠올려봐. 십 중의 구, 아니 백중의 구십구, 우리가 남들과 나누는 대화 중에 뭐 오르락내리락 곡선이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재미없게 쭈우우우욱 낮거나 아니면 24시간 성난 황소처럼 쭈우우우욱 높거나. 아니, 여러분들은 요새 아예 대화 자체를 별로 안 하려나? 문제 만드신 분이 정말 너어무 리얼리스틱하게 대화문을 짰나 보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거저 주는 문제는 여러분도 거저 받아먹어야 해요. 출제자가 다 던져줬는데 뭘. 여러분 여자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어요, 네? 마지막에 뭐라고 했냐구요. (학생1과 2, 대화하다 말고 집중한다.) 뭐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흥분하며) 대화 앞부분은 다 필요 없고 마지막에서 정답 다 나왔어 정말. 이렇게 거저 주는 문제가 어딨어? 마지막에 여자가 화장실이 어딨는지 아냐고 물었죠? 왜 그랬을까? 출제자가 왜 그렇게 마지막에 이 말을 던져줬을까? 제가 정말 강사 생활하면서 누누이 얘기하는 거지만, 여러분, 늘 항상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해야 해요. 출제자의 의도를. (학생1과 2의 고개를 치켜세운다.) 출제자의 눈으로 대화를 바라보면 대화의 질감이 달라져요. 여러분,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이 대화문 한 번 더 들려줄게요. 이번에는 뭐를 생각하면서 듣는다? 출제자. 출제자의 시각으로 들어봐요. 자 그럼, 틀어주세요! (영어 듣기 도입부 음악이 들리고 Man과 Woman, 강단으로 올라가 일어선 채로 서로 마주 보며 대화한다. 학생1과 2,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한다. 강사는 유유자적 퇴장한다. Man과 Woman의 시선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것인지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를 생성해내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둘은 대화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마치 무대 장식인 듯 그대로 서 있다.)
Woman Number 11.
Man What a lovely day to be outside!
Woman Yes, it is so breezy and warm.
Man I’m so sorry we have to work in this perfect day.
Woman Tell me about it. I’m so dreading this life.
Man Haha Oops, it’s already 12:50. We gotta head back to our place.
Woman Alright. Well, do you happen to know where the restroom is around here? (학생2, 공책에 무언가를 헐레벌떡 받아적는다.)
학생2 여자의 마지막 말, 여자의 마지막 말…
학생1 그게 무슨 소용이야? 마지막 말만 알면 우리가 뭐 어쩔 건데!
학생2 화장실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 물었어.
학생1 그래서?
학생2 분명 나한테도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었어. 봤잖아. 전에 나한테 화장실이 어딨는지 물어보는 거 봤잖아.
학생1 똑같은 말만 꼭두각시처럼 반복한다는 말이로군. 저건 1인 스쿼시도 아니야. 스쿼시 할 때 공이 맨날 똑같은 데로 튀는 거 봤어?
학생2 또 잊히기 전에 빨리 그려야 해… 빨리 이 빈 도화지를 채워야 해. (학생2, 빈 공책에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한다.)
학생1 그냥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예의상의 말일지도 몰라.
학생2 (고개를 들며)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보는 게?
학생1 애초에 화장실의 위치를 왜 물었겠어?
학생2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학생1 그럴 수도…
학생2 좋아, 여자가 화장실의 위치를 물은 까닭은? (A)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절박하게 학생1을 바라보며) 그다음?
학생1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말일지도 몰라…
학생2 (한숨을 쉬며) 그래, 그것도 선택지에 넣어주지. (B)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학생1 (B)가 정답! 다른 아무것도 볼 필요 없이 (B)가 무조건 정답!
학생2 잠깐. 이 세상에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어딨어? 소리가 모여서 단어가 되고 단어가 모여서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서 말 한마디가 되는데 말 한마디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가당키나 해?
학생1 말 한마디를 쪼개면 여러 개의 문장이 되고 문장을 쪼개면 여러 개의 단어가 되고 단어를 쪼개면 소리가 된다. (일부러 침이 튀기게 학생2를 향해서) /ㅍ/,/ㅋ/,/ㅌ/,/ㅍ/,/ㅊ/!!!!! 이따위 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어?
학생2 남자가 침을 뱉는다.
학생1 뭐?
학생2 남자가 되묻는다.
학생1 그만해.
학생2 남자의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학생1 그만해.
학생2 남자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학생1 그만 하라고!
학생2 남자가 분개하며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학생1 그만하라고오!!!!!!!!!!!!!! (학생1, 학생2의 공책을 뺏어서 강단 쪽으로 집어던진다.)
학생2 (놀라며) 남자가 공책을 힘차게 내던진다.
긴 침묵.
학생2 (강단 위에 떨어진 공책을 주우며) 그냥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예의상의 말일지도 몰라.
학생1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할까?
학생2 뭐가?
학생1 (울먹이며) 아직도 눈치를 못 챈 거야? 아니면 눈치를 못 챈 척하는 거야? 이제 너도 더는 부정할 수 없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두 귀로 똑똑히 들었잖아. 똑같은 경기가 서너 번이나 반복됐는데도. 볼 때마다 모습이 달라져. 똑같은 대화를 몇 번이나 들었는데도 들을 때마다 내용이 달라져 버려.
학생2 그래, 저 대화는 돌려 말하기야. 아주 명백한 돌려 말하기. 진실을 숨기려고 이리저리 빙빙 둘러대다 이리 꼬고 저리 꼬고 오장육부 다 꼬여서 심성까지 모조리 싹 다 꼬여버리는 파렴치한 돌려 말하기. (Man 앞에 달려가서 조롱하듯) 꼬꼬댁 꼬꼬꼬. 이 가면극의 허수아비들아. 입이 달렸으면 제대로 말을 한번 해보지그래? (Man의 멱살을 잡는다.) 응? 어서 아무 말이나 씨부려보란 말이야.
학생1 (다급하게) 물어봐!
학생2 뭘?
학생1 여자가 마지막에 한 말의 의미가 뭔지!
학생2 (멱살을 더 꽉 잡으며) 들었지? 여자가 마지막에 한 말의 의미가 뭐야? 여자가 왜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본 거지? 응?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Man, 학생2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 멱살을 잡고 있는 학생2의 두 손을 강하게 내려친다.)
Man (영어 모국어 화자의 억양으로) 조용히 해. (학생1과 2, 충격받은 채 무대 앞쪽으로 온다.)
학생2 들었지?
학생1 들었어.
학생2 달라졌어.
학생1 확실히 달라졌어.
학생2 뭐가 달라졌지?
학생1 말의 무게가 달라졌어.
학생2 말의 기풍이 달라졌어.
학생1 말의 성질도 달라졌어.
학생2 말이 더 가까워졌어.
학생1 심장에 비수처럼 바로 팍! 꽂히는 기분이었어.
학생2 비수“처럼”?
학생1 미 미안! 그러니깐 말이 더 가까워졌다고!
학생2 내가 방금 한 말이잖아.
학생1 네가 나한테 다른 선택권을 주지 않았잖아.
학생2 구차한 변명이야.
학생1 비유를 하지 않으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건 다 발라먹은 뼈다구밖에 없어.
학생2 또!
학생1 비유를 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학생1, 손으로 입을 막는다. 사이.)
학생2 지금이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본질을 가리는 그 살덩어리들이 접착력을 잃고 뼈다구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 다시 가서 직접 물어볼 거야.
학생1 (항의하듯) 살덩어리? 뼈다구?
학생2 시간이 없어, 빨리 가서 물어봐야 돼.
학생1 직접!
학생2 직접! (학생2, 다시 Man 앞으로 간다.)
학생2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뗀다.) Why did y (학생2, 놀라서 입을 막으며 뒷걸음칠 친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뗀다.) Why did y (겁에 질린 표정으로 Man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진다.)
학생1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학생2 말이! 언어가!
학생1 언어! (성스러운 종소리가 들린다. Man과 Woman, 종교 의례를 하듯 동시다발적으로 성스러운 몸짓을 하며 움직인다. 성스럽고 으스스한 음향이 무대를 가볍게 채운다. Man과 Woman, 학생2를 강단 밖으로 매몰차게 내보내고 무릎을 한쪽만 꿇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듯 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내 교단의 교주처럼 웅장하게 차림을 한 인물이 들어온다.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한 교파를 이끄는 교주다운 무게감이 느껴진다.)
출제자 (관객을 바라보며) 출제자입니다.
학생1 출제자!
학생2 대화를 만든 장본인!
출제자 제가 바로 대화를 만드는 사람이지요. (출제자, 무릎을 꿇고 있는 Man과 Woman의 손등에 키스한다. Man과 Woman, 자리에서 일어나 출제자의 뒤로 가서 충신이 왕을 호위하듯 서 있다.)
출제자 세상엔 고급스러우면서도 맛깔나는 대화가 있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반면, 너무도 근본 없이 천박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런 오물 같은 대화도 있습니다. 헌데 전자는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고, 후자는 만들기는 꿀돼지 죽을 만들기 같이 쉬워도 만들다가 내가 되려 오물이 될까 두려운 그런 대화라서, 비단 출제자라면 그 중간 지점을 찾으려고 애써야 하는 법입니다. (학생1과 2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제 곧 또 다른 대화를 준비해야 하니 저는 이만 물러가 봐야겠습니다. (학생2, 출제자를 막아선다.) 궁금한 점이 많을 줄로 압니다.
학생2 그럼 대답을 해주면 되겠군.
출제자 세상에 이런, 예술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대화해야 하는 법입니다.
학생1 여자가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본 이유가 도대체 뭐지?
출제자 이것 참 곤란한 처사이군요.
학생2 여자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답으로 적절한 것은?
출제자 쉿.
학생1 여자의 감정으로 알맞은 것은?
출제자 그만! (Man과 Woman, 출제자의 손짓에 학생1과 2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간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는 두 사람. 출제자, Man과 Woman을 뒤로 보낸다. Man과 Woman, 출제자가 손으로 지시를 하자 들리지 않지만 대화하는 시늉을 한다. 출제자, Man과 Woman을 감상하듯 바라보면서) 예술가에게 마이크폰을 쥐여 주면 그는 곧 예술 작품을 망치는 지름길. (처음과는 다르게 독기가 서려 있는 말투로) 예술가의 침묵을 되지도 않게 깨버리는 행위는 곧 예술가를 살해하는 것과도 같은 행태. 예술가가 자기 예술 작품에 얼씨구나 좋다 하고 헤벌쭉 떠들기 시작하는 순간 작품이 가졌던 오묘한 매력은 깨져버리고 남은 건 볼품없는 뼈다구일 뿐. 뼈다구 따위는 들짐승에게 던져버리거나 재가 될 때까지 태워버리는 게, 그게 뼈다구가 지닌 오직 하나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학생1과 2에게 다가가며) 그러니 그대들이 내 작품을 망치려고 하는 수작은 나를 죽이려는 것과 진배없으니 내가 감히 지켜만 보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요,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당장 그 부유하는 몸뚱이를 치워주시면 아주 감사하겠습니다.
학생1 그렇지만, 저 대화는, 저 대화는 볼 때마다 모습이 바뀐단 말이야.
학생2 똑바로 볼 수가 없어, 똑바로 볼 수가 없어.
출제자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만물이 변하고 천하에 똑같이 남아있는 게 단 하나도 없거늘 대화라고 해서 그대들이 볼 때마다 모습이 똑같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니고 무엇인지. 이렇게 멍청하게 얼씨구나 떠들고 있는 동안 세상은 아주 잘들 돌아가고 있는데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달이 지구를 돌듯이 도대체 그대들이 벌이고 있는 이 쓸모없는 난센스는 어디를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는지. 더는 소중한 시간을 헛된 곳에 낭비하기 싫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야겠습니다. (강사 등장. 출제자, 가던 길을 멈춰 선다. 강사에게 악수를 건넨다.)
강사 (악수를 무시하고) 언제나 출제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란 말이에요. 아니, 대화 하나 알아듣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두 사람의 대화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워요? 두 사람의 대화가 그렇게 멀게 느껴지냐구요. 미국말이라서? 여러분, 이제 영어가 미국말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돼요. 글로비쉬 몰라요? 글로비쉬. 글로벌이랑 잉글리쉬 합친 말. 이제 전 세계가 쓰는 말이라구요. 이제 영어를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이 세상에서. 여러분 영어는 과거가 아니에요. 현재진행형이야, ing. 그러니까 언제나 복습, 복습, 복습, 재확인, 재확인, 재확인! 멀게 느낄 필요 없어. 여러분 한국말이랑 똑같아. 아니야? 예전에 한 학생이 저한테 수업 끝나고 와서 질문하더군요. 도저히, 아무리, 똑같은 문제를 몇 번을 들어도 못 알아듣겠다고. 그래서 대답했어요. “그러면 한국말도 똑같아.”
학생2 (소리치며) 거짓말!!!!!!!!!!!!!!!!!!!!!!!!!!!!!!!!!!
강사 저한테 이렇게 하소연하더군요. “선생님, 차라리 영어가 모국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직도 마음 아파라. “영어랑 한국어가 위치를 바꿨으면 좋겠어요. 영어가 모국어로, 한국어가 외국어로요. 그러면 이 고생 안 해도 되잖아요?” (사이.) 알아요. 영어가 차암 멀게 느껴지는 거. 마치 떠나간 연인과도 같아요. (우수에 잠기며) 한때는 참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제 더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아무튼, 여러분, 영어가 멀게 느껴져요? 그럴 필요 없어. 가까워지려고 해봐요. 여러분이 한번 대화에 참여해서 직접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그래 보라니까. 그럼 좀 느낄 수 있으려나? 방에서 거울 보고 혼자서 대화라도 한 번 직접 해보란 말이에요. (강사, 유유자적 퇴장한다. 학생1과 2, 멈칫하며 무대 앞쪽을 바라본다. 쭈뼛쭈뼛 무대 앞쪽으로 나와 출제자와 관객을 번갈아 쳐다본다.)
출제자 (흥미롭게 바라보며) 가끔은 길거리에서도 꽤 괜찮은 배우를 만날 수 있는 법이지요. 무대는 당신들의 것입니다. (학생1과 2, 출제자와 서로를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해 한다.)
학생2 그럼.
학생1 (멀리 떨어지며) 안 할 거야. (사이.)
학생2 (떨어진 만큼 거리를 좁히며) 할 거야. (사이.)
학생1 안 할 거야.
학생2 할 거야.
학생1 안 할 거야.
학생2 할 거야.
학생1 안 할 거라고.
학생2 할 거야.
학생1 안 할 거야.
학생2 할 거야!
학생1 안 할 거야!!!
학생2 할 거라고!!!!!!
긴 침묵.
학생1 그럼. 내가 먼저 서브를. (목을 가다듬고 어색하게) 밖 밖에 나오니 정말 좋네요? (연기 톤 풀고) 하지만 여긴 밖이 아니라 실내잖아?
학생2 지금 연기를 하는 거잖아. 마치 밖에 나와 있는 것처럼 대사를 쳐야 된다고!
학생1 실내 스쿼시가 아니라 야외 테니스처럼?
학생2 됐어. 내가 먼저 시작한다. (목을 가다듬고) 밖에 나오니 정말 좋네요!
학생1 날씨가 정말 좋고 바람도 산뜻하네요.
학생2 이렇게 완벽한 날에 일해야 한.
학생1 (말을 끊으며) 못하겠어.
학생2 도대체 왜?
학생1 이런 게 대화라면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학생2 그리고?
학생1 내가 하는 말 같지가 않아.
학생2 당연하지. 이건 연기니깐.
학생1 그래도, 대화라면 무언가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하잖아. 이 대화에는 그런 게 없어.
학생2 에너지가 없다고?
학생1 그래. 에너지!
학생2 그럼 에너지를 듬뿍 넣어서 하면 되겠네. (목을 가다듬고 과장되게) 밖에 나오니 정말 좋네요! (학생1을 기다린다.)
학생1 (주춤하다 과장된 몸짓으로) 날씨가 정말 좋고 바람도 산뜻하네요!
학생2 이렇게 완벽한 날에 일해야 한다니 정말 곤욕이네요!
학생1 (몸을 비비 꼰다.) 맞아요. 이 인생이 싫어지려고 그러네요!
학생2 하하 이런. 벌써. (학생2에게) 몇 시지?
학생1 (속삭이듯) 12시 50분.
학생2 벌써 12시 50분이네요. 들어가야겠어요!
학생1 (실망하며) 그래요. 혹시. 이 근처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학생2 모르는데요. (학생1, 놀라서 무대를 가로지른다.)
학생1 알 것 같아.
학생2 모른다니까?
학생1 알 것 같다고!
학생2 뭘!
학생1 왜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봤는지.
학생2 뭔데?
학생1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어.
학생2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학생1 (기괴한 웃음)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어. 좋아하고 있다고! (다시 기괴한 웃음) 생각을 해봐. 내가 직접 말해 보니깐 이제야 알 것 같아.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본 건 왜지? 여자가 화장실의 위치를 정말 몰랐을까? 화장실은 은밀한 곳이야. 특히 이성 간에는! 그런데 왜 갑자기 화장실을 간다고 그래? 화장실에 가서 뭘 하려고? 그래 화장실 칸에 외롭게 앉아서 자기가 느낀 실망감을 해소하려는 거야. 화장실은 무엇이든 사적인 걸 해도 되는 공간이니까! 여자는 남자가 너무 원리원칙주의자라 거기에 싫증을 느낀 거야. 알고 보니 너무 뻔한 남자거든. 아니면 환멸 같은 걸 수도 있어. “12시 50분”? “들어가야겠어요”?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어 자신과 같이 있어 주길 바라고 있었는데 남자는 관심을 주지 않으니 실망감이 크겠지. 재미없는 남자. 알람이 울리면 땡! 하고 움직여야 하는 남자. 생각해 봐. 나 같았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 버리면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엉엉 울어버릴걸? 너무 실망스러우니깐! 실망감이 그렇게나 큰 이유는 바로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어서야! 됐어. 모든 미스터리가 풀렸어!
출제자 참 재미있는 하나의 해석이군요.
학생1 (출제자의 멱살을 잡는다.) 내 말이 맞잖아! 내가 수수께끼를 풀었잖아. (Man과 Woman, 위협적인 표정으로 다가온다.) 빨리 말해. 내 말이 맞다고! 여자가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본 게 바로 남자를 좋아해서라고!
학생2 말해!
학생1 말해 빨리!
학생2 말해!
학생1 당장 말하라고!
출제자 (멱살을 거칠게 풀며) 나도 모릅니다.
학생1, 2 (동시에) 뭐?
출제자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학생1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학생2 당신이 출제자잖아.
출제자 그대들의 우매한 지능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한마디 친히 해 드리자면. (목을 가다듬는다. Man과 Woman을 어루만지며) 여자가 화장실이 어디인지 왜 물어봤는지 그 연유가 궁금하다고요? 나도 모릅니다. 대화를 만든 출제자인 나도 그건 모릅니다. (흥분해서) 나는 이 대화를 상자 안에 가둔 적이 없어. 내가 이 대화를 상자에 가뒀다고 생각하는 건 당사자들의 인생이 상자 안에 가둬진 것처럼 느껴서겠지! 다시 손쉽게 이야기를 해줄까? 지금 자기 인생이 답답하고 앞날이 캄캄하니깐 숨이 턱 막히고 물에 빠져 익사하는 기분이겠지. 미래는 까마득하고 먹고 살 궁리는 해야 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신체 능력, 지적 능력은 퇴화하고. 누군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싶겠지. 그 화풀이 대상이 바로 나야. 이 아무 죄 없는 출제자. 그래,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욕을 먹지. 그런데 부모가 자식의 모든 잘잘못에 책임져야 한다는 건 정말 잔인한 도덕적 망상이야. 그게 그대들이 바라는 건가? 내 대화도 하나의 생명체야.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숨을 쉬며 돌아다니는 내 자식과도 같은 존재. 그러니 되지도 않게 대화가 어쩌고저쩌고 마지막 말이 어쩌니저쩌니 위험한 질문을 건네서 내 자식의 숨통을 끊어놓는 짓은 그대들의 우매한 뇌 속 망상에서나 친히 활개치길 바라며 나는 그럼 이만. (출제자, Man과 Woman을 데리고 서둘러 퇴장한다. 긴 사이. 학생2, 출제자가 있던 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본다. 공책과 펜을 바닥에 널브러뜨린 채 주위에 주저앉는다. 학생1, 그 옆을 긴장된 몸짓으로 서성인다.)
학생1 들었지?
학생2 들었지.
학생1 모른대.
학생2 모른다더라.
학생1 대화를 만든 사람도 모르는 거면.
학생2 대화를 듣는 사람도 몰라야 하나?
학생1 (벌떡 일어서서) 그건.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스터리야.
학생2 (울먹이며) 알 수 없는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야.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는 건 언제나 인류의 염원이었어. 도화지가 비어 있으면 색을 채워 놓고 싶은 게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야. 그렇지만 도저히. 도저히. 적어 내려갈 수가 없어. 저 둘의 대화는. 내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의미가 점점 희미해져 버려. 왜 그런 걸까? 저 둘이 돌려 말하고 있어서일까? 저 둘이 지금 비유를 하고 있는 걸까? 적을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자꾸 가면을 바꿔버려. 나는 저 둘의 대화를 파악할 수가 없어. (사이.)
학생1 나는 좋아.
학생2 무슨 소리야?
학생1 나는 네가 아무 글자도 적을 수 없다는 게 좋아.
학생2 지금 남의 고통을 조롱하는 거야?
학생1 그런 소리가 아니야! 그런 소리가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학생2 말해! 돌려 말하지 말고 쭈뼛대지 말고 나를 보고 똑바로 말해!
학생1 그 하얀 빈 종이. 우리 부모님의 눈망울과 비슷해.
학생2 또 비유, 비유, 비유, 비유, 너는.
학생1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제발! (사이.)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을 똑똑히 기억해. 아마도 엄마나 아빠가 나를 안고 있었겠지. 둘 다일 수도 있고. 나는 나를 바라봤던 그 눈동자를 생생히 기억해. 그 눈동자에서 하얀 도화지를 봤어. 처음엔 부모님의 눈동자가 참으로 아름답다 생각했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어. 그 하얀 도화지는 부모님의 눈동자가 아니라 부모님의 눈동자에 비친 나였다는 걸. 때 묻지 않은 하얀 도화지가 바로 나였어. (강단으로 올라간다.) 기대였을까? 질투였을까? 부모님은 우주를 가득 담은 눈망울을 하고 나를 내려다봤어. 내가 우주였을까? 내가 미지의 세계였을까? 아마 저마다 그 하얀 도화지에 무엇을 그릴지 상상했겠지? 내가 어떻게 자랄까.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누구랑 결혼할까. 직업은 뭘까. 자식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하얀 도화지는 정말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어. 하지만 어린 사자는 자라야 해. 빈 도화지는 채워지고 실체가 드러나고 말지. 부모님의 눈빛은 실망스러운 물감으로 채워지고 내 인생의 밑그림은 되돌릴 수 없이 아주 진해져. 나는 고정돼 버린 거야. 내 인생은 볼품없는 완성품일 뿐이야. 내 인생은. 어린 사자가 봤던 그 그림자를 더는 볼 수가 없어. 나는 좋아 그래서. 네가 그 빈 종이에 아무것도 적을 수 없다는 게 좋아. (퇴장한다. 긴 사이. 학생2, 절박함에 가득 차 공책을 사납게 뒤적거리며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한다. 몇 줄 적다가 이내 공책과 펜을 집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출제자와 강사 등장하여 학생2 주변에 선다. 영어 듣기 평가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10초간 정적. 이윽고 세 사람 번갈아 가며 빠르게 말하기 시작한다. 세 사람이 말하는 동안 1장 처음에 등장한 듣기 평가 지시사항 녹음본도 동시에 겹쳐서 무대에 재생된다. ‘/’ 표시는 서로 끼어들어 말하는 부분을 나타낸다.)
학생2 (올려다보며) 여자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답으로 적절한 것은?
출제자 출제자인 나도 모릅니다.
학생2 만든 사람이/ 모르는 거면.
강사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해야 해요.
학생2 빈 깡통과도 같다/는 말이잖아?
출제자 하지만 훌륭한 비평가들/이 있지요.
강사 이 대화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어요.
학생2 빈 깡통. 비유. 비유.
출제자 작품은 자식/과도 같은 존재.
학생2 여자가 화장실의 위치를/ 물은 까닭은?
강사 오고 가는 에너지를/ 느껴봐요!
학생2 정말 멍청한 질문/이잖아?
강사 우문현답/이라는 말 알죠?
출제자 부모는 자식을/ 통제할 수 없지요.
강사 (확실히 들리게) 스따압! 정신 똑바로 차려요! (음악 소리, 지시사항 녹음본 꺼지면서 정적. 학생2와 출제자, 일제히 강사를 쳐다본다.) 질문이 멍청해도, 현명하게 대답하라! 이거에요. 누가 멍청하고 쓸모없고 머리에 와 닿지도 않는 말을 건넨다고요? 그럼 일단 화내지 말고! 침착하게! 현명한 대답을 찾으라 이거에요. 그럼 오늘 강의는. (사이.) 여기서 끝내도록 할게요.
출제자, 학생2 (동시에) 잠깐만! (강사, 유유자적하게 퇴장한다. 학생2와 출제자, 정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 이윽고 관객과 서로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다가 무대 암전.)
에필로그
강단을 중심으로 조명 밝아진다. Man과 Woman, 강단에 걸터앉아있다. 이전 대화와는 다르게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다.
Man What a lovely day to be outside!
Woman Yes, it is so breezy and warm.
Man I’m so sorry we have to work in this perfect day.
Woman Tell me about it. I’m so dreading this life.
Man Haha Oops, it’s already 12:50. We gotta head back to our place. (일어선다.)
Woman (같이 일어서며) Alright. Well, do you happen to know where the restroom is around here? (두 사람, 무덤덤하게 정면을 바라본다. 이윽고 어두워지는 조명. 막.)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31/2018123101108.html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문의 향연] "福이란 행운이 아니라 재앙 없는 삶이 이어지는 것" (0) | 2019.01.03 |
---|---|
'황금 돼지띠' 그대여, 세파를 뚫고 전진하라 (0) | 2019.01.01 |
[팀 알퍼의 한국 일기] 유럽 팬들마저 끌어당기는 K팝의 '팬덤' (0) | 2019.01.01 |
[아무튼, 주말] 일본인이 존경한 다나카 대법원장… 법보다 도덕의 가치를 강조했다 (0) | 2018.12.29 |
[남정욱의 영화 & 역사] 人間임을 깨닫게 해준 100년 前 '하룻밤의 평화' (0) | 2018.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