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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팀 알퍼의 한국 일기] 유럽 팬들마저 끌어당기는 K팝의 '팬덤'

팀 알퍼 칼럼니스트

입력 2019.01.01 03:12


지구 상 어디서 災害가 일어나면 한국 팬클럽은 가수 이름으로 구호 물품을 보내고 움직인다
경쟁·고독에 지친 젊은이들이 온라인서 되살린 공동체 의식에 유럽 팬들도 공감하며 응원에 참여


만약 수년 전 나의 모국인 영국 사람들에게 '어느 나라에서 제2의 비틀스가 탄생할 것인지 예상해보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 누구도 '한국'이라는 대답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영국 사람 대부분은 한국이 세계 지도에서 어디쯤 있는지 잘 모른다. 우스꽝스러운 머리 모양을 한 북쪽 지도자와 핵·미사일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과 프리미어 리그(EPL)에서 뛰고 있는 몇몇 한국 선수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최근 보도되는 방탄소년단(BTS)에 관한 기사들은 사실이다. BTS는 실제로 미국과 유럽의 간판 토크쇼에도 출연했다. BTS는 인종을 불문하고 함성을 지르는 십대 팬들을 북반구 전역에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유럽 전역의 언론에서는 그들에게 '제2의 비틀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많은 언론사가 BTS를 제2의 비틀스로 언급할 때 그들은 장발을 하고 시타르를 연주하며 히피 문화의 선봉에 서거나 '렛 잇 비(Let It Be)'와 '헤이 주드(Hey Jude)'를 불렀던 비틀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둥근 머리에 말쑥한 슈트를 입고 '아이 원 투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를 부르며 소녀들이 기절할 때까지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던 초기의 비틀스를 말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작은 손짓 한 번만으로도 팬들을 집단적인 열광 상태로 빠뜨리던 가수는 비틀스뿐만이 아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나 재키 월슨 역시 노래 중간에 살짝 골반을 비틀기만 해도 수많은 여성 팬이 바닥에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는 한 번쯤 들었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살아온 12년 동안 언제나 한국 팬들의 열정과 지극정성에 놀랐다. 지구 상 어디엔가 참혹한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한국의 팬클럽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이름으로 쌀이나 구호물품을 보내고 그 어느 구조단보다 빨리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한국의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한약부터 생일 케이크까지 팬들이 보낸 선물들을 정리하는 데 아마도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서울 강남의 지하철역을 걸어 나오면 아이돌 스타의 대형 사진과 생일 축하 메시지로 가득한 광고판을 여럿 볼 수 있다. 팬들의 사비(私費)로 제작한 이런 광고판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어떠한 난관도 자신들의 사랑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뜨거운 맹세가 적힌 수많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팬들은 온라인 포럼을 개최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새로운 앨범이 메이저 차트의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 모색한다. 유럽 사람들에게 이런 열정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팬덤을 결코 따라 할 수 없다. K팝은 유럽 팬들을 자석과 같은 힘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유럽 팬들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아이돌 그룹을 응원하는 것이 비록 온라인상에서지만 얼마나 흥미진진한지에 대해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유튜브에서 K팝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에 달린 댓글들을 한번 검색해 보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과도 같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그 어떤 종교도 K팝의 팬덤보다 강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조차 K팝의 팬들이 인기 그룹의 이름으로 캄보디아에 있는 작은 마을의 학교를 후원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변두리 국가에서 글로벌 파워를 지닌 부국(富國)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겪으며 전통적인 한국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파괴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렀다. 팬덤은 한국적인 솔(soul)이 갈구하는 공동체 의식을 대변한다. 팬덤은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비이성적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팬덤은 수천년 동안 간직해온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가 흔들리고 도전받는 현상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서양식의 자본주의와 도시 생활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개인주의, 경쟁, 고독으로 끌고 갔다. 하 지만 팬덤은 고락(苦樂)을 함께 나누던 오래전 한국의 공동체적 삶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이런 팬 카페들은 사이버 공간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팬덤은 허구가 아니라 실체에 가깝다. 그곳의 멤버들은 대화와 경험, 감정을 공유하며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진실된' 행동이라고 부를 만한 행동들을 함께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진심으로 그들을 경외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31/20181231026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