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중 기자
입력 2018.09.08 03:00
엘리트주의가 사라진다
어느 집단이나 '엘리트'라 불리는 소수가 있다. 사회 각 분야를 이끌며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빛과 그림자가 있지만, 한국 사회의 발전은 상당 부분 이들이 주도했다는 평가가 많다. 김태유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세계적인 석학들도 한강의 기적 뒤에 소명감을 가진 엘리트 행정관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했다. 정부만의 얘기는 아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호명한 '1%의 천재들'은 연구개발에 매진해 오늘날 '초격차'의 삼성을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과제 중 1호는 '적폐 청산'이었다. '권력기관을 민주적으로 개혁하겠다'는 것. 군(軍)과 법원, 검찰과 경찰에 '적폐'의 이름으로 크고 작은 칼을 휘둘렀다. 기존 주류 상당수가 '살생부'에 올랐다.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사익을 취한 나쁜 엘리트에게는 정당한 처벌이겠지만, 단지 엘리트였다는 이유만으로 '적폐' 주홍글씨가 붙은 이들은 호소하고 항의한다. 엘리트는 모두 적폐인가.
사실상 폐지 수순 밟는 경찰대
서울의 한 경찰서에 근무하는 30대 초반 A경위. 이 경찰서에 경찰대 출신은 약 20명으로, 갓 들어온 20대 신참부터 퇴직을 바라보는 50대 중간 간부까지 다양하다. 분기마다 친목 모임이 있는데, '007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철저하게 비밀이다. 소문이라도 나면 '경대 출신들이 패거리 지어 다닌다'는 뒷얘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A경위는 "요즘은 모두가 신세한탄밖에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찰대 폐지론이 고개를 든 이후다.
올해 1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권력기관 개혁안을 발표하며 경찰대를 정조준했다. "경찰대를 개혁해 특정 그룹이 권한을 독점하지 않도록 조정하겠다"고 했다. 결국 경찰은 2020년부터 경찰대 신입생 선발 인원을 절반인 50명으로 줄이고, 5000만원에 이르는 학비 전액 지원과 군 복무 대체 혜택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정원의 50%는 편입생 또는 순경 등으로 채울 예정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경찰대가 사실상 폐지 수순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A경위는 "서울대도 노려볼 수 있는 수능 점수를 받았지만 제복이 멋있어 보여 경찰대에 진학했다"면서 "전문성 있는 경찰이라는 자부심으로 배우고 일하는데 갑자기 '적폐'로 몰아버리니 얼떨떨하다"고 했다.
특히 20기 이하, 20~30대 아래 기수들의 불만이 많다. 지방의 한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대 출신 B경감은 "아무런 이익도 챙기지 않았는데, 적폐라는 낙인만 돌아왔다"고 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출세가 어느 정도 보장돼 졸업생의 절반 가까이가 별(총경)을 달았다. 지금은 인사 적체가 심해 우리 때는 아마 10%도 총경이 되지 못할 거라 한다. 동기 100여 명 중 상당수는 이미 로스쿨이나 행정고시로 방향을 틀었다."
경찰대는 경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고 유능한 경찰 인재를 확보한다는 목표로 1981년 개교했다. 초기 경쟁률은 200대 1이 넘었고, 2000년대 들어서도 50대 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유지했다. 재학생들 사이에선 '서울대나 연·고대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일 처리 능력과 이미지 향상 등 경찰 조직의 발전을 선도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개혁의 대상이 됐고, 모교(母校)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았다. 경찰대 1기인 황운하 울산지방경찰청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경찰대 출신들이 집단으로 권력을 사용한 사례가 단 하나라도 있느냐"며 "수사권 조정 등으로 경찰에 우수한 인력이 더 많이 필요해진 때에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김태유, 이건희, 문재인, 조국, 황운하
어제의 엘리트가 오늘의 적폐
어제의 엘리트는 오늘의 적폐가 된다. 사법부에선 무차별 사정과 강압적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행정처 출신 법관들이 줄줄이 사표를 냈다. 내부에서 "유능하다"고 평가받던 중견 법관들이 한꺼번에 법복을 벗은 것은 전례가 드문 일. "요직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재들이라 법원 내·외부에서 충격이 컸다"고 한다. 법원행정처는 법원 예산과 인사, 사법 정책 수립과 재판 지원 등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다. 판사 3000여 명 중 1%인 30여 명이 소속돼 있다. 심의관 20여 명은 평판사 중에서 재판 실력과 근무 평정, 성격까지 두루 종합해 선발한다. 여기서 인정받으면 부장판사는 물론 대법관까지 되는 경우도 많았다. '효율적인 사법행정을 주도한다'는 자부가 이들에게 있었다. 행정처 출신 판사들이 코너에 몰린 것은 지난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 주도의 무리한 상고법원 추진, 비자금 의혹 등이 표면화됐다. 행정처 근무 경력은 그 자체로 '적폐'가 됐고, 범죄 집단으로 매도됐다. 판사 전용 익명 게시판에는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적폐 판사라는 말을 듣기 싫다"며 수십 명의 판사가 법원을 떠났다. 한 전직 부장판사는 "일부는 가고 싶어서 간 곳도 아닌데, 행정처 근무 그 자체로 역차별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은 원자력 학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분야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해 온 서울대와 카이스트는 연구의 맥이 끊길 위기다. 서울대에서 1500명, 카이스트에서 1000명이 넘는 석·박사가 배출됐다. 고리 1호기 운전, UAE 원전 수출 등 역사적인 현장에 이들이 있었다. 2012년 원전 정전 사고 등을 거치며 '원전 마피아'라는 이름이 붙더니 정권이 바뀌면서 '적폐' 딱지가 붙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업계에선 과거 성적서 위조나 납품 비리를 뼈저리게 반성하고 자정 노력을 해왔다"며 "요즘엔 탈원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적폐로 몰아붙이고, 생산적인 토론조차 막는다"고 했다.
60년 동안 원자력 산업을 지탱해온 인재 양성 시스템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전국 16개 대학 3000명에 이르는 예비 원자력 공학도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카이스트에선 올해 2학년에 올라가는 학부생 94명 중 아무도 원자력 전공을 택하지 않았다. 한 서울대 재학생은 "자부심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와 공부했는데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됐다. 미래가 없는 분야가 돼버리니 공부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내치기만 하면, 그다음엔 어떡하나
과잉 엘리트주의의 폐해는 분명하다. 과거 육사 출신 장성들은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핵심 요직을 독점했다. '모피아'라 불리는 재무부 출신 관료들은 거대한 세력을 구축해 장차관은 물론 산하 금융기관장까지 독식한다는 비판이 높다.
하지만 엘리트를 '청산'하고 난 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박주희 바른사회시민회의 사회실장은 "새로운 인재 양성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나 철학 없이 기존 엘리트를 내치는 데만 급급하다면, 그 후과(後果)는 국민이 짊어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빈자리는 시민단체나 정부와 '코드'가 맞는 정치인 등 외부 인사들로 채워지고 있다. 미·중·일·러 4강(强)의 대사는 모두 비(非)외교관 출신이다. 외무고시를 거친 20~30년 경력의 외교관들은 배제됐다. 친문 성향 정치인 출신 노영민 주중대사는 지난해 "롯데 철수는 사드 때문"이라고 하는 등 실언을 해 구설에 올랐다. 올해 6월 베이징에서 북·중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노 대사는 충북 청주의 지역구 행사에 참석해 논란이 됐다. 6일 현재 문재인 정부의 국무위원 중 순수 관료 출신은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조명균 통일부장관 등 2명에 불과하다. 시민단체 출신 김은경 환경부 장관은 재활용 쓰레기 대란 사태를 놓고 잇따른 '헛발질'로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그는 친정 격인 환경단체의 사퇴 요구까지 받
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엘리트들은 떠나고 있다. 주한규 교수는 "원전 설계업체는 이미 일감이 떨어져 중동으로 인재 탈출이 시작됐다"고 했다. 관가에서 올해 8월까지 재취업 심사를 받은 공직자 숫자는 713명으로 전년 동기(385명)의 1.9배다. 세종시의 한 사무관은 "많은 관료를 적폐로 보고, 검찰 수사까지 몰고가는 상황에 체념한 공무원이 많다"고 했다.
김명수, 양승태, 주한규, 박주희
노영민, 김동연, 조명균, 김은경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07/2018090701692.html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y] 유신에 맞섰던 강직한 언론인… 땅 문제로 신군부에 발목잡혔다 (0) | 2018.09.08 |
---|---|
[Why] 입주민끼리 소송만 10여건… 30억 타운하우스에 무슨 일이 (0) | 2018.09.08 |
[東語西話] 애연가들의 황금기는 조선 時代 (0) | 2018.09.06 |
[김경준의 리더십 탐구] 리더가 개인 성향을 고집할 때 공동체는 난파한다 (0) | 2018.09.04 |
[Why] 뭐든 적어야 산다… 적폐 수사에 메모광이 된 공무원들 (0) | 2018.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