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입력 2018.09.06 03:10
문예 부흥 열었던 正祖, 흡연으로 가슴 답답함 풀리자 온 백성에게 담배 보급 권장
흡연자가 눈치 보는 지금과 달리 조선 후기엔 담배를 藥草로 대접
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 한문학(漢文學) 동호인들과 함께 중국 저장성 동부 지역을 성지순례 삼아 다녀왔다. 50~60대 이상이 주축을 이루다 보니 의외로 애연가가 많았다. 이들은 "서해 바다를 건너오니 담배 때문에 주위 눈치를 볼 일이 없어 좋다"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한 예로 중국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마다 깡통으로 만든 정식 재떨이가 소변기 위쪽 선반에 놓여 있었다. 외지인들이 그 용도를 모를까봐 겉에 '연항(烟缸·담배 연. 항아리 항)'이라고 친절하게 인쇄체로 박아놓았다. 개인 차원을 넘어 거의 '사회적 친절' 수준이었다. 식탁에 앉을 때마다 담배 이야기는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했다. 금연주의 바람에 밀려 인내해온 흡연주의자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비(非)흡연가인 나도 어느새 같은 편이 돼 맞장구를 치고 있다. "금연권도 권리이지만 흡연권도 권리다. 두 권리의 공존 대책을 찾아야 한다"는 중도론으로 거들었다. 점심시간마다 금연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애연가들이, 길거리마저 금연지구로 지정되는 바람에, 회색지대에서 움츠린 모습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물고 있는 서울 종로 뒷골목의 안쓰러운 풍경까지 겹쳐진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마음껏 흡연을 즐겼던 것 같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흡연 문화도 시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하긴 17세기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담배는 약초(藥草)처럼 모두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특상품(特上品)이었다.
조선의 문예부흥을 열었다는 정조(正祖·1752~1800) 임금은 '담배 예찬론'을 폈다. 그는 특이체질인지라 담배와 궁합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유일한 취미가 독서였던 정조는 책만 붙들고 있다가 결국 가슴 답답증을 얻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정무(政務)까지 더해지면서 증세가 더 심해졌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어의(御醫)들이 온갖 처방을 했지만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였다. 오직 담배만 효과를 보일 뿐이었다. 담배를 하면 가슴 막힌 게 풀리면서 밤잠까지 편히 잘 수 있었다. 저술한 원고를 수정할 때도 담배의 힘이 컸다고 믿었다. 덕분에 '홍재전서'라는 엄청난 분량의 개인 문집까지 남겼다. 심지어 정사(政事)의 잘잘못을 고민할 때 이를 분명하게 잡아내고 요점을 찾아낸 것도 담배의 힘이라고 정조는 술회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성군(聖君)일지라도 신하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말려야만 될 말씀이었다. "온 백성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여 그 효과를 더욱 확장시키도록 하여라."
정조와 비슷한 시대의 애연가로 매암 이옥(梅庵 李鈺·1760~1815) 선생도 있다. 그는 일상생활의 경지를 뛰어넘어 흡연을 종교적 경지로까지 승화시켰다. '연경(烟經·담배경전)'이란 책을 지었다. 제목에서 보듯 세속적인 이미지의 담배라는 말과 신성한 이미지의 경전이란 단어를 과감하게 조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교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 전북 완주 송광사(松廣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할 만큼 수준급이다. 매암 선생은 '담배경전'의 저자답게 절대 금연 구역인 사찰에서 흡연을 시도하다가 엄한 제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파격적인 논리를 동원했다. "향 연기도 연기(煙氣)고 담배 연기도 연기다. 똑같은 연기를 이 연기와 저 연기로 나눌 뿐이다. 나는 연기를 사랑한다. 담배 연기도 좋아하고 향 연기도 좋아한다"는 억지 주장으로 결국 흡연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속사정은 강의를 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강사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조, 홍재전서, 원각경
애연가들과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흡연 부스를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거기에도 어김없이 '흡연은 가족의 건강을 해칩니다'라는 당부가 붙어있다. 이제 흡연을 적극 권장하며 담배 애호가들의 든든한 배경이었던 정조 임금도, 흡연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파하던 이옥 선비도 이미 200여 년 전에 떠났다.
오늘도 '건강을 태우겠느냐'는 주변의 반문(反問)과 간절한 눈빛을 뒤로한 채 고립된 흡연실과 흡연 지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그때마다 혹시 정조 임금과 이옥 선생 두 어른께서 군신(君臣)으로 환생하길 바라며 정성스럽게 향(香)을 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05/20180905039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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