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사 기자
입력 2018.09.01 03:02
공무원들의 안전장치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한창이던 2016년 11월 노트 하나가 세상에 나왔다. 그해 8월 간암으로 별세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 수첩이었다. 노모는 아들이 남긴 수첩 두 권을 남의 눈이 닿지 않는 방 맨 안쪽 서랍에 뒀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수첩을 꺼내 들고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난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억울함이 있으면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를 언론에 내줬다. 김 전 수석은 2015년 '정윤회 문건' 사건이 불거졌을 때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과 갈등을 겪었다. 김 실장이 자신을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게 하자 사표를 냈다.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정치권에선 김 실장이 이 사건 등과 관련해 우병우 당시 민정비서관과 직접 상의하며, 김 전 수석을 업무에서 배제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비망록(備忘錄)이 공개되자 파장은 거셌다. 날짜별로 빠짐없이 적힌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내용은 권력의 내밀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김 전 수석은 검사 시절부터 메모하는 습관은 있었지만, 메모광은 아니었다. 이렇게 지시를 꼼꼼히 메모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메모를 워낙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3년 장차관, 수석비서관, 행정관들에게 "적지 않고 어떻게 기억을 하느냐. 제가 이야기하고 각 부처가 실천해야 하는데 안 적고 있으면 불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시가 있으면 적는 게 당시 청와대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비망록은 검찰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하는 데 실마리 역할을 했다. 김 전 실장뿐 아니라 박 전 대통령까지 김 전 수석의 메모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김영한 정윤회 김기춘 우병우 박명수 최순실
'적어야 산다'
최근 관가에도 '적어야 산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유가 좀 다르다. 정권의 흥망에 따라 자신이 한 일이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어 필기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자발적 메모광이 된 공무원들은 이전에 구두로만 오가던 지시들을 포스트잇이라도 붙여 개인적으로 기록해 둔다고 한다. 업무 지시가 시간을 두고 달라질 때는 이런 작업은 필수가 된다. 중앙 부처에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적어두는 편이 업무 효율성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일지식으로 남겨둔다"고 했다.
공무원 집단은 학습 효과가 빠른 조직이다. 이들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후 주식 처분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을 때, 공정위 한 서기관의 사소한 메모가 사건을 푸는 장면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공정위는 2015년 10월 삼성물산 합병 후 삼성SDI와 삼성전기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 각 500만주씩 1000만주를 매각하도록 권고하는 안을 결정했다. 정재찬 당시 공정위원장 결재까지 끝난 일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김학현 부위원장이 이 결정을 500만주 매각으로 바꿔 업무 지시를 내렸다. 주식을 적게 매각할수록 총수 일가의 지배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 서기관은 이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해 남겼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메모가 없었다면 수사 전개가 느려지고, 엉뚱한 사람이 의심받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고 했다. 석연찮은 지시를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메모든 녹음이든 일종의 안전장치는 둬야 한다는 게 요즘 공무원들의 사고다.
비망록의 역사
비망록은 과거에도 뒷말과 논란을 숱하게 낳았다. 1962년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대일 청구권을 뒷전에서 협상했다가, 2년 뒤 관련 메모가 폭로되면서 원치 않는 외유를 떠나야 했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1997년 3월부터 11월까지 8개월 동안의 상황을 '환란일기'라는 이름의 비망록으로 썼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후임인 임창렬씨를 공격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강 전 총리는 외환 위기 심각성을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찰 수사를 받았는데, 비망록도 수사 대상이었다. 2001년 이용호 게이트 때는 이용호 G&G그룹 회장이 뇌물을 준 내역을 담은 비망록을 남겨 놓았다고 말해 정국을 뒤집어 놨다.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이 나서 "로비 비망록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지만 여야는 한동안 이전투구를 벌였다.
정재찬 김학현 김종필 오히라 마사요시
강경식 임창렬 이용호 신승남
안종범 전 경제수석의 수첩은 정권의 운명까지 바꿨다. 검찰과 박영수 특검팀이 '사초'라고 표현한 이 수첩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뇌물죄 혐의를 뒷받침하는 스모킹 건 역할을 했다. 안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2년간 수첩 63권에 나눠 기록했다. 이 중 24권은 안 전 수석 측이 검찰에 제출한 것이지만, 39권은 안 전 수석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이던 김모 전 청와대 행정관이 제출한 것이다. 수첩은 작성 시기나 객관성, 제출 경로 등을 두고 여러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받았다.
안종범 박영수 박근혜 최순실 이재용
비망록의 두 얼굴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다는 본뜻과 달리 사적 감정이 혼합돼 의도를 의심받는 경우도 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검은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서재에는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지가 한 다발 놓여 있었다. 여기엔 이 전 대통령 일가에 22여억원을 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메모는 이 전 회장이 쓴 15권에 달하는 비망록 중 일부분이다.
'메모광'으로 불리는 이 전 회장은 자신이 돈을 건넨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상득 전 의원의 비서에게 돈을 건넸다고 기록한 부분에는 시간과 이동 차량, 마신 차까지 적었다. '김모 비서관(이 전 의원 비서관)과 14시 신관에서 만나기로 약속. Cash delivery건. 그는 오렌지주스 시킴. 나올 때 차 값은 내가 계산. 일단 3 3 4(3억원, 3억원, 4억원)로 하기로 함.', '1억5000이 든 두 가방을 김모 차에 싣고 떠났음. 차를 보려고 했으나 어두워 넘버가 보이지 않고 차 종류는 SM5로 보임.'
이 전 회장은 그러면서 '나는 그(이 전 대통령)에게 약 30억원을 지원했다. 옷값만 얼마냐. 그 족속들이 모두 파렴치한이다' '이 전 대통령에 증오감이 솟아나는 것은 왜일까' '(이 전 대통령 사위를 향해) 침이라도 뱉고 싶다. 참았다. 나쁜 자식' 등 감정 섞인 얘기를 적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비망록으로 뇌물죄 처벌 가능성이 더 커진 상태다. 이 전 회장은 뇌물 공여자 신분이지만,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을 피했다. 이 전 대통령 측은 비망록의 작성 동기 등을 따져 묻고 있다.
과도한 적폐 수사 탓 분석도
비망록이 계속해 세간에 오르내리면서 한편으론 메모하는 동료가 껄끄러워진 측면도 있다고 한다. 간부회의 내용을 꼼꼼히 메모하는 이라도 있으면 '내 이름을 수첩에 적는 것이냐'며 슬쩍 묻거나, 아예 회의 때 휴대전화 등을 가지고 오지 말라는 상사도 있다고 한다. 녹음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망록 얘기가 많아 최근엔 상사의 앞이 아니라 나중에 따로 기록해 두는 방식을 이용한다"는 게 부처 공무원들 얘기다.
이런 세태의 이유를 무리한 적폐 수사에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메모가 일종의 보신(保身)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추진한 교육부 관계자 등 17명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수사 의뢰하면서, 과장급 이하 실무자 6명도 포함했다. 당시엔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면 징계를 받았을 테
지만, 지금은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는 셈이다. 직권남용죄가 일종의 무기처럼 변해버린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게 메모광들의 항변이다. 법무법인 민주의 서정욱 변호사는 "계속된 적폐 수사가 공무원 사회에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라며 "비공식적인 기록이 많아질 경우 커다란 보안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팔성 이상득 서정욱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31/20180831018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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