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9.01 03:02 | 수정 2018.09.08 10:08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39>노천명(1911~1957)
산나물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던 시인
단지 사나운 표범에 쫓겨 일제와 인민군 지지했을뿐
놀란 사슴 같은 슬픈 눈빛 사무치게 그립고야
노천명 시집 사슴의 노래 시집 나의생활백서 김활란 김동길
우리 세 사람은 가끔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두 사람과 나는 나이 차이가 어지간하였지만 그들의 의견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젊은 내가 중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로 하여 노천명은 나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책 제목은 '우리 친구 이정애'였는데 출간된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환송하는 장소가 소공동의 반도호텔이었다. 시인 노천명은 거기까지 와 저도 나도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천명은 내가 귀국하기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미국 유학 중에 나는 노천명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 편지에 적혔던 한마디가 오늘도 그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애절하게 만든다. 그는 6·25가 끝나고 이듬해 '나의 생활백서'라는 수필집을 하나 냈다. 피란 시절 어느 아침 부산의 한 재래시장에 들렀다가 시골 아낙네들이 뜯어온 싱싱한 산나물 보따리를 보면서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는가'라고 그 책에 한마디 썼다고 한다. 그런데 편지에 나를 가리켜 그가 찾던 '산나물 같은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고 써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편지 한 장을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였겠는가. 그러나 신촌 집을 몇 번씩 뜯어고치면서 내가 집에 없는 동안 그 편지가 들어 있던 허술한 편지 묶음을 영영 잃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겠지.
천명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가 가산을 정리한 뒤 서울로 이사 왔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서 소학교를 마쳤고 진명여고를 졸업한 뒤 드디어 이화여전의 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 교수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던 월파 김상용에게 시를 배웠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가 선생들과 친구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언어 선택과 구사가 천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당시의 신문사나 잡지사에 글을 썼는데 순수하다 못해 어리석다고 할 만큼 정치에 무관심하던 노천명은 발악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의 한심한 글을 몇 편 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그의 생애에는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월북했다 돌아온 임화 등 친북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그들의 궐기대회에도 모습을 나타내 국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했을 때 천명은 구속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광섭, 모윤숙 등이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해 풀려났다. 그는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저질러 일제 말기에는 일본을 두둔하는 글을 썼고 인민군 치하에서는 그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는 부역자로 몰려 한동안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 친일파가 되어 본 적도 없고 공산주의자가 되어 본 적도 없고 단지 사나운 표범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처럼 갈팡질팡하였을 뿐이다.
김상용 임화 김광섭 모윤숙 김기림
그런 엄청난 수난을 겪으면서 노천명은 더욱 내성적이 되고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놀란 사슴 같은 맑은 두 눈을 가지고 인생의 가시밭에 번번이 쓰러져 피를 흘린 것뿐이다. 그는 빈혈로 청량리에 있는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입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고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동료 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입원비를 대납하겠다고 했을 때 완강히 거부하였다. 친구 하나가 그의 병실에 찾아왔을 때 그는 원고료를 받기 위해 병원 벽에다가 원고지를 대고 원고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달쯤 뒤에 또다시 쓰러져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지만,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누하동의 허술한 자기 집에서 혼자 요양하다가 1957년 6월 16일 새벽,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46년의 매우 짧은 삶이었다. 시인이자 평론가이던 잘생긴 김기림의 끈질긴 구애도 물리치고.
그대의 겁에 질린 그 눈빛을 마지막 본지도 어언 60년의 매우 길고 긴 세월이 흘렀건만 그 처절하게 슬픈 눈빛이 이 글을 쓰는 어제도 오늘도 사무치게 그립고야.
▲9월 1일 자 B2면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노천명'에서 노기남 대주교는 시인 노천명과 친척 관계가 아니므로 바로잡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31/20180831017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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