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18.02.01 03:13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본 두고 '誤譯' '제2의 창작' 논쟁 벌어져
한국 문학 영어 번역 관심도 상승
AI 발달에 '번역가 無用論' 나와도 흠 없는 문학 번역은 있을 수 없어
번역가 지망생들의 도전 기다려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To be, or not to be'는 흔히 '사느냐, 죽느냐'로 번역된다. 그밖에 다양한 번역이 나와 있다.
셰익스피어, 햄릿(책), 햄릿(영화)
한국 영문학계의 첫 세대에 속한 최재서는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라며 유장하게 옮겼다. 이밖에 '삶이냐, 죽음이냐' 또는 '있음이냐, 없음이냐'라며 존재론적 고민을 더 강조한 번역도 있다. 가장 최근에 번역본을 낸 설준규 한신대 영문과 명예교수는 꽤 색다르게 옮겨서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대로냐, 아니냐'로 옮겼다. 그는 "삶과 죽음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그것을 넘어설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재서, 설준규, 한강, 데버러 스미스, '채식주의자'
2016년 맨 부커 국제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영역본을 두고 오래 오역(誤譯) 논쟁이 벌어졌다. '팔'을 '발'로 오역한 사소한 경우에서부터 주어가 빠진 한국어 문장을 옮길 때 발화 주체가 뒤바뀐 오역까지 지적됐다. 심지어 지나친 윤문에 대한 비판도 등장했다. 번역가인 데버러 스미스는 "내가 번역한 '채식주의자'가 한국어 원전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어떤 측면에선 전적으로 옳다"며 번역의 창조성을 내세워 반박해왔다. 하지만 최근 그녀는 원작자와 협의한 끝에 60여 개의 오역을 수정하기로 했다. '채식주의자' 오역 논쟁은 국내의 관심만 끈 게 아니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1월 중순 클레어 아미스테드 문화부 차장의 칼럼을 통해 오역 논란을 다루면서 '번역가가 원작자와 함께 수정본 작업을 지금껏 해왔음을 인정했다'고 전했다.
이 칼럼은 스미스가 원전보다 영어권 독자에게 충실한 'activist(실천적 번역가)'라고 옹호했다. 김성곤 전(前) 한국문학번역원장도 스미스의 번역을 지지했다.
그는 "번역은 제2의 창작이므로 번역가는 원문을 과감하게 편집할 때가 많다"며 "데버러 스미스 덕분에 외국 언론에 한국문학 기사가 400여 개나 나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스미스의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비판한 정과리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낯섦을 낯섦대로 두는 상태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행위가 번역"이라며 "데버러 스미스의 창조적 번역은 기본을 무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무튼 이 논쟁은 '채식주의자' 영역본의 개정판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전례 없이 번역 비평이 활발했던 것은 한국 문학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 문학의 영어 번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김성곤, 정과리
지난달 20일 서울대에서 데버러 스미스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평창올림픽 국제인문포럼엔 청중 130여 명이 몰렸다. 외고 학생부터 영문학도에 이르기까지 나름 영어에 일가견이 있는 젊은이들이 대거 참석했다. 한국 문학의 영역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인터넷엔 홀로 '채식주의자' 영역을 분석한 학생들의 글이 올라 있기도 하다. '채식주의자' 오역 논쟁은 국내외의 '한국 문학 번역가 지망생'들에게 좋은 자극을 줬다.
데버러 스미스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전혀 알지도 못하는 한국어를 왜 6년이나 독학했을까. "한국이 잘사는 나라이고, 문학도 활기 있는 곳인데, 영국엔 한국문학 번역의 경쟁자가 드물기 때문에 한국어를 실용적 목적으로 공부했다"고 그녀는 밝힌 적이 있다. 맨 부커 국제상이 스미스의 번역을 원문과의 세심한 대조 없이 인정한 까닭도 그러한 모험 정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채식주의자' 번역 논쟁은 과거와 달리 한국문학 영어 번역도 경쟁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린다. 영어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번역자의 인세(印稅) 수입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번역가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들 하지만, 문학 번역에 관한 한 천만의 말씀이다.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흠이 없는 문학 번역은 없다. 잘 쓴
번역과 못 쓴 번역이 구별될 뿐이다. 한국 문학의 영어 번역이 국내외적으로 청춘의 미래 시장이 되길 바란다.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이 이미 한국문학 세계화를 위해 마중물을 붓는 역할을 묵묵히 해왔다. '채식주의자' 성공은 그런 노력을 빛낸 일이었다. 오역 논쟁으로 그 빛이 바래지는 않았다. 오히려 번역가들이 늘 들여다봐야 할 거울로 제 빛을 내게 됐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31/20180131033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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